美, 대중국 견제 심화에…K-반도체 '선택의 기로'
수출 다각화 및 기술 개발에 전략적으로 나설 필요
미국과 중국간 반도체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업체들의 출구전략 마련이 시급해졌다. 미국의 수출통제 조치가 보다 강력하고 장기화될 것으로 전망되면서 최악의 경우 사업 철수까지 고민해야 할 상황이다.
양국의 '신냉전' 움직임 속 한국의 중립 유지가 어려워진 가운데 전문가들은 인도, 동남아 같은 신시장 비중을 적극적으로 늘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중장기 문제로 접근해야 하는 만큼 제도적 보완 역시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2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반도체 수출 규제'로 노골화된 미국의 대중국 견제 정책에 대응 방안을 다양하게 고심하고 있다.
지난달 초 미국 상무부는 미국 기업이 중국의 반도체 생산기업에 반도체 장비를 수출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하는 강력한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했다.
외국 기업이 소유한 생산 시설의 경우 개별 심사로 결정하겠다고 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영향권에 놓였지만 '1년 유예'를 받아 급한 불은 끈 상황이다.
그러나 1년 뒤에도 유예 조치가 연장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어 불확실성에 대비한 대응 마련이 시급해졌다. 노종원 SK하이닉스 사장은 3분기 컨퍼런스콜에서 "유예 조치를 1년씩 연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며 "생산 거점을 다변화하는 것은 중장기적으로 보면 필수불가결하다"고 언급했다.
노 사장의 설명과 같이 최선의 시나리오는 매년 수출통제 유예 조치를 받아 정상적인 중국 사업을 운영하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과 쑤저우에 낸드플래시 생산 공장과 반도체 후공정(패키징)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우시에 D램 공장을, 충칭에는 후공정 공장을 두고 있다. 다롄에는 인텔로부터 인수한 낸드 공장이 있다.
중국 내 생산설비가 적지 않은데다 최대 수입국 역시 중국이어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고민은 커질 수 밖에 없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반도체 수출액 1280억 달러 중 대중국 수출은 502억 달러로 약 39%를 차지했다. 홍콩(266억 달러)을 포함하면 비중은 60%로, 수출이 중단되면 당장 타격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미국의 견제는 반도체 뿐 아니라 배터리, 전기차 등 전 산업분야로 확산되고 있어 중장기적인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특히 반도체는 한국 수출의 20%를 책임지고 있는 '성장 엔진'으로 전략적이고도 신중한 결정이 요구된다.
대안으로 기술 성숙도가 낮은 공정 기술을 중심으로 중국 생산기지를 운영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미 상무부가 수출 제한 기준을 ▲18nm(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D램 ▲128단 이상 낸드 플래시 ▲14nm 이하 로직칩으로 구체화한 상황에서 최소 마진만 확보할 수 있는 낮은 단계·저기술군 제품 생산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최대 수입국인 중국 시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반도체 설비도 철수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설비 업그레이드 없이 해외에서 저수익 제품을 계속 생산·판매한다는 것은 한계가 분명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더 크다.
중국의 추격 역시 만만치 않다.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보조금 지급 등으로 반도체 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D램 제조 업체 창신메모리, 낸드플래시 업체 YMTC,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업체 SMIC 등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기술 개발에 나서는 상황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자국 기업이 만든 제품을 우선 채택하게 될 것"이라며 "이는 자연스럽게 한국 기업의 점유율이 줄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기업들이 중국에서 사업을 계속 영위하고 싶어도 미국의 제재 수위 확대, 중국의 자국산 우대 정책이 이어지는 한 결국 시장 철수를 고려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미국에 반도체 원천기술을 의존하는 상황에서 중국 수요가 언제까지나 견조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리스크가 크다고 말한다.
실제 미국은 설계, 생산장비 등 전방공정에서 지배적 위치에 있는 반면 중국은 패키징, 테스트 등 후방공정에서 높은 점유율을 갖고 있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 등에 따르면 반도체 생산장비에 대한 미국 점유율은 41%이며 설계 소프트웨어와 시스템 반도체 설계는 각각 74%, 67%로 높다. 이는 미국 기술로 만든 해외 생산 반도체 장비가 적지 않음을 의미하며, 미국의 규제 조치에 한국이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SK하이닉스의 '중국 철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지만 글로벌 시장이 녹록지 않게 전개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 이미 내부적으로 충분한 검토를 거쳤을 것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업계는 지금부터라도 중국 외 지역을 중심으로 수출 다각화 전략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반도체 시장은 메모리 반도체를 중심으로 '혹한기'를 보내고 있지만, 중국 외 지역의 수요는 지속적으로 견조할 것으로 예상돼 발 빠르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양팽 연구원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 움직임과 정책적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대중국 수출이 중단되더라도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나고 다른 국가에서 대체 수요가 발생할 것"이라며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주요국의 탈중국화로 재편되는 생산기지가 대체 수요를 소화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상식 무역협회 동향분석실장도 "중국에 대한 미국의 반도체 견제는 재작년부터 계속돼왔다"면서 "가급적 기업들이 중국 내에서 활동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이나 결국 양자 택일을 선택하는 수순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반도체 공급망, 기술 강화를 위해 미국의 주도 아래 추진되는 '칩4' 동맹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김양팽 연구원은 "일본의 반도체산업이 1980년대 중반 미국 조치로 쇠퇴하기 시작한 이후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반면교사 삼아 반도체 동맹에 대한 참여를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만 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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