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만 관객 공포에 떨게 한 '살인 기생충'
[양형석 기자]
김은희 작가의 남편으로도 유명한 장항준 감독은 <불어라 봄바람>과 <기억의 밤> 등 본인이 연출한 영화들은 물론이고 영화 <박봉곤 가출사건>과 <북경반점>, 드라마 <싸인>,<드라마의 제왕>의 각본을 썼을 정도로 글을 잘 쓰는 감독이다. 하지만 장항준 감독은 지난 2002년 본인의 장편영화 데뷔작 <라이터를 켜라>에서는 각본을 직접 쓰지 않고 전문 시나리오 작가로 이름을 떨치던 박정우 작가에게 각본을 맡겼다.
90년대 초반부터 여러 영화의 각본과 조연출을 맡아오던 박정우 작가는 1999년부터 김상진 감독과 콤비를 이뤄 <주유소 습격사건>과 <신라의 달밤>,<광복절특사>를 연속으로 흥행시키며 작가로서 전성기를 달렸다. 하지만 연출부와 조감독 경력이 있는 박정우 작가 역시 작가로 활동하면서도 천천히 감독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고 2004년 이성재 주연의 <바람의 전설>을 만들며 드디어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 <연가시>는 470만 관객을 동원한 <조선명탐정>에 이은 김명민의 두 번째 흥행작이다. |
ⓒ CJ 엔터테인먼트 |
한국에서도 꾸준히 만들어지는 재난영화
사실 할리우드에서 '재난영화'는 오랜 기간 꾸준히 사랑 받았던 장르다. 화재를 소재로 하는 <타워링>이나 <분노의 역류>는 물론이고 전염병이 등장하는 <아웃브레이크>와 <컨베이전>,그리고 <죠스>나 <피라냐> 같은 무서운 동물이 나오는 영화도 재난 영화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할리우드에는 <인디펜던스 데이>와 <투모로우>,< 2012 > 등 재난 영화를 전문으로 만드는 롤랜드 에머리히 같은 감독도 있다.
한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재난영화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지만 2000년대 이후 재난영화들이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다. 할리우드처럼 한국에서도 가장 먼저 등장한 소재는 역시 '불'이었다. 특히 2000년에는 최민수와 차승원, 유지태 주연의 <리베라 메>와 신현준, 정준호, 고 장진영 주연의 <싸이렌>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 흥행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2012년에 개봉한 <타워>도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1000만 관객을 돌파한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한국영화 최초로 할리우드에서 와이드 릴리즈 개봉을 했던 심형래 감독의 < D-WAR >,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 조일형 감독의 < #살아있다 > 등은 각각 괴수영화와 좀비영화라는 장르에 속한다. 하지만 괴수와 좀비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들이 발생하면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영화들도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재난영화로 분류할 수도 있다.
한국형 재난영화의 대가(?)로 부를 수 있는 배우는 역시 하정우다. 하정우는 2013년 한강다리가 폭발하는 재난상황이 나오는 <더 테러 라이브>를 시작으로 무너진 터널 안에서의 생존기를 그린 <터널>, 백두산이 폭발하는 한반도의 재난상황을 다룬 <백두산> 등 여러 재난 영화에 단골로 출연했다. 하정우가 세 편의 재난 영화를 통해 모은 관객 수만 해도 2000만이 훌쩍 넘을 정도로 하정우의 재난영화는 관객들에게 이미 검증을 마쳤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재난영화에 코믹적인 요소를 섞은 '퓨전 재난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2019년 여름에 개봉했던 조정석과 윤아 주연의 <엑시트>는 재난액션 영화에 코믹한 요소들을 적절히 섞으며 940만 관객을 동원, 기대 이상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작년에 개봉한 차승원과 김성균,이광수 주연의 <싱크홀>도 도심 속 싱크홀 사고라는 무서운 재난상황을 무겁지 않게 다루며 210만 관객을 모았다.
▲ <연가시>는 <도둑들>,<다크나이트 라이즈> 등 국내외 대작들이 쏟아져 나오는 여름방학 시즌에 450만 관객을 동원하며 선전했다. |
ⓒ CJ 엔터테인먼트 |
영화 <연가시>는 흔히 곤충에게 기생하는 철사벌레 연가시가 인간의 몸에 기생하면서 엄청난 치사율을 가진 병으로 발전한다는 무서운 설정을 가진 공포 및 재난영화다. 물론 이는 직접 시나리오를 쓴 박정우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이 더해진 설정으로 실제로 연가시는 인간의 몸 속에 기생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를 보고 진짜 연가시가 내 몸 속에 들어올지 모른다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2012년 여름 시즌이 들어갈 때 개봉한 <연가시>는 개봉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후 다음 주부터 곧바로 <다크나이트 라이즈>에게 흥행 1위 자리를 내줬다. 하지만 <연가시>는 여름 시즌 내내 <다크 나이트 라이즈>와 <도둑들> 같은 흥행작들의 협공(?) 속에서도 꾸준히 관객을 모으면서 최종적으로 450만이라는 괜찮은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이는 박정우 감독이 감독으로 데뷔한 후 첫 번째 흥행작이었다.
물론 이 작품을 '순수 호러물'이라고 구분할 수는 없지만 재난영화와 호러물의 특징이 적절히 섞인 <연가시>는 역대 호러물 흥행 1위였던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310만)의 기록을 여유 있게 제쳤다. <연가시>가 많은 관객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은 실제로도 있을 법한 실감나는 이야기와 작가 시절의 주특기였던 코미디 요소를 철저히 배제한 박정우 감독의 진지한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열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얀 거탑>의 천재 외과의사, <베토벤 바이러스>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로스쿨>의 법학과 교수 등 여러 드라마를 통해 엘리트 연기에 익숙했던 김명민은 <연가시>에서 두 아이를 둔 소시민 가장으로 변신했다. 특히 어렵게 구한 치료제를 불쌍한 모자에게 나눠 주다가 흥분한 사람들에게 깔려 약을 빼앗기고 절규하는 장면은 장준혁 교수나 강마에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김명민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박정우 감독은 <연가시>가 개봉한지 4년이 지난 2016년 김남길과 문정희, 정진영 등이 출연한 또 하나의 재난영화 <판도라>를 선보였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서 모티브를 따와 한국에서 원전사고의 위협이 발생한다는 설정의 영화 <판도라> 역시 전국 450만 관객을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작가 시절엔 코미디, 감독 시절엔 재난영화에서 능력을 발휘하던 박정우 감독은 <판도라>를 끝으로 6년째 신작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다.
▲ 문정희가 연기한 경순은 '엄마의 힘'으로 치명적인 연가시의 고통을 이겨냈다. |
ⓒ CJ 엔터테인먼트 |
재혁(김명민 분)의 아내 경순(문정희 분)은 지난 여름 바쁜 남편 대신 아이들을 데리고 친구네 식구들과 물놀이를 다녀왔다. 이로 인해 세 식구의 몸 속에 연가시가 들어가면서 수용소에 격리된다. 연가시의 산란기가 다가오자 경순은 엄청난 갈증을 참지 못하고 수용소의 물을 마시기 시작하지만 눈이 뒤집혀 물을 마시는 엄마를 보고 우는 아이들을 발견하고 다시 이성을 되찾는다. 배우 문정희의 모성애 연기가 돋보인 장면이었다.
90년대 후반 연극배우로 데뷔한 문정희는 2000년대 들어 영화와 드라마로 활동범위를 넓혔고 차분하고 지적인 목소리와 안정된 연기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박정우 감독의 연출 데뷔작 <바람의 전설>에서 꽃뱀 연기를 선보인 문정희는 박정우 감독이 연출한 4편의 영화에 모두 출연했다. 2014년에는 염정아와 고 김영애 배우, 천우희 등과 함께 비정규직 노동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카트>에 출연하기도 했다.
신화 출신의 가수 겸 배우 김동완은 <연가시>에서 주식에만 몰두하는 강력반 형사이자 김명민이 연기한 임재혁의 동생 임재필을 연기했다. 우연히 가게 된 강원도 출장에서 물가의 변사체들을 발견하고 본격적으로 사건에 뛰어든 재필은 형수와 조카가 감염됐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사건에 몰두한다. 영화 속에서 주로 감정적인 연기를 김명민이 도맡아 했다면 김동완은 액션 등 몸을 쓰는 연기를 전담했다.
지금은 지상파 금토드라마(<원 더 우먼>)의 단독주연으로 나올 정도로 인기배우가 된 이하늬도 지금보다 인지도가 높지 않던 시절 <연가시>에서 질병관리본부 소속의 연구원 송연주 역으로 출연했다. 연가시의 위험성을 일찍 파악하고 적절한 조치들을 상부에 건의하지만 번번이 상관에게 묵살 당하는 비운(?)의 캐릭터였다. 하지만 송연주는 영화 후반부 치료약의 합성법을 알아내 치료약을 대량생산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