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맥경화] 대규모 유동성 공급 발표에도…여전사 "체감도 낮아"
[아시아경제 유제훈 기자] 정부가 채권시장안정펀드,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 프로그램 등으로 자본시장에 50조원+α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하겠다고 발표했음에도 카드사, 캐피탈사 등 여신전문금융사들의 '돈맥경화'는 좀처럼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업권에선 보다 정확하고 속도감 있는 유동성 공급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2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10월 한 달 간 기타금융채 순 발행액은 -3조4423억원으로 집계됐다. 상환액이 5조1330억원에 달하지만 발행액은 1조6907억원 수준에 그친 결과다. 이른바 '레고랜드 사태'로 채권시장의 경색이 촉발된 지난 9월 순 발행액(-1조5120억원)의 2배 수준이다.
자체 수신 기능이 없는 카드·캐피탈사 등 여전사들은 필요 자금의 60~70%를 채권발행에 의존한다. 채권 상환액이 발행액을 크게 넘어서는 것은 곧 여전사들이 자금경색에 시달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신규 발행에 성공했더라도 금리 수준이 5.965~9.821%로 연초(2.420~6.154%) 대비 350bp(1bp=0.01%)가량 뛰어오른 상황이어서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여전사들은 사실상 신규 여신을 중단하고 유동성 관리에 집중하고 있는 상태다. 신용등급 A-급인 한 캐피탈사의 경우, 지난달 초 자금 경색을 이유로 영업부서에 대출 기한연장과 관련한 심사를 강화하겠단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이 회사는 "자금시장 경색으로 자금조달 어려움이 매우 심각한 상황"이라면서 "만기도래 여신은 무조건 상환하고, 부득이하게 상환이 불가한 경우 4개 조건을 충족하지 않고서는 기한 연장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이 회사는 곧 여신 연장에 대해 시장 환경을 고려해 선별적으로 대응하겠다며 다소 수위를 낮춘 공문을 재차 내려보냈지만, 이는 현재 여전사, 특히 중소형 여전사들이 겪고 있는 돈맥경화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단 평가다. 업계 한 관계자는 "차환 발행이 거의 되지 않다 보니 신규 기업·투자금융 사업은 물론 리테일 영업까지 사실상 중단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정부가 50조원+α 규모의 채권시장안정펀드,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 프로그램을 운영하겠다고 밝힌 지난주 이후로도 여전업권이 체감하는 변화는 크지 않다는 게 여전업권의 중론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신용등급이 낮은 중소형 여전사들이 체감하는 현실은 더 심각하다. 실제 유동성 공급이 발표된 23일 이후 7영업일 간 채권발행 통계를 보면 기타금융채의 순 발행액은 -9150억원에 머물렀다.
이들 중소형 여전사들이 유동성 공급을 체감하지 못하는 것은 현재까지 실현된 유동성 규모가 크지 않고, 신용등급 AA급 등 우량 채권을 대상으로 공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마저 대부분 기존 발행된 채권을 상환하는 용도로 쓰여 매입 대상이 아닌 비우량 채권시장으로의 낙수효과도 기대하기 어렵단 평가다.
아울러 국내 채권시장의 주요 플레이어인 연기금, 보험사 등 기관들은 자체 운용지침을 통해 높은 신용등급의 회사채·여전채 등에만 투자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중소형 업권에 끼치는 영향이 적고, 또 다른 큰 손인 개인들도 최근 시중은행 및 상호금융권의 예금금리가 5~6%대로 뛰어오르면서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큰 여전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상황이다.
업계에선 정부가 유동성 공급에 더욱 빠르게,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호소한다. 한 중소형 캐피탈사 관계자는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면 단기간 내 5조~6조원의 자금을 투입하고 BBB급 등 낮은 신용등급의 채권으로 매입 대상을 확대하는 등 속도감과 폭을 넓힐 필요가 있다"면서 "또 부동산 시장에 묶여 있는 자금을 자본시장으로 환입시키기 위해선 한국자산관리공사 등을 통한 자산 매입 프로그램 등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전했다.
유제훈 기자 kalama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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