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20선 집안…뇌경색 이긴 선거의 여왕 "낙선도 20번"

전수진 2022. 11. 2.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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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철 고문의 부인 김덕신 여사가 지난달 31일 서울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뇌경색 덕에 그림도 그리고, 책도 출판한 거죠. 모든 고난은 축복입니다.”
정치인 정대철의 부인 김덕신(79) 여사의 말이다. 지난달 31일 서울 정일형ㆍ이태영 기념관에서 만난 그는 휠체어에 앉아서도 꼿꼿한 모습이었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정일형은 그의 시아버지,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 박사는 그의 시어머니다. 북한 평양 출신인 그의 할머니 박현숙 역시 시대를 앞서간 여성 정치인이었다. 큰아들 정호준도 정계에 진출했다. 가족 구성원의 국회의원 선수(選數)를 따지면 20선이고, 이 숫자는 앞으로도 늘어날 터다. 이들의 당선의 일등공신이 바로 김덕신 여사다. 그런 김 여사가 5년 전 뇌경색으로 왼쪽 팔다리가 마비됐다. “어느 밤에 눈을 떴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더라”는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고도 담담했다.

Q : 상심이 크셨겠습니다.
A : “남편을 불러서 응급실에 갔는데 이상하게도 담담했어요. 워낙 충격이 크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 같더군요. 반성도 많이 했어요. 그동안 휠체어 탄 사람들 보면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 분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처지를 이해하게 됐죠. 나를 이모저모로 훈련시켜주시는 거죠.”

김덕신 여사(뒷줄 왼쪽) 부부와 시어른들과 자녀들. 막내가 태어나기 전이다. 김덕신 여사 제공

Q : 재활 과정이 궁금합니다.
A : “지금은 혼자 지팡이 짚고 다닐 정도로 발전했어요. 돌이켜보면 전조 증상이 몇 번 있었는데 알아차리지 못하고 바쁘게 일만 한 제 잘못이에요. 그림 그리는 게 큰 힘이 됐어요. 다행히 왼쪽만 마비가 됐으니 오른손으로 그릴 수 있었죠. 미술의 ‘ㅁ’자도 몰랐지만 여행 다니며 그림 보는 걸 워낙 좋아했고, 남편, 딸, 며느리 등 가족의 격려가 큰 힘이 됐어요. 그림을 그리는 동안엔요, 몸이 불편한 걸 잊어요. 옆에서 누가 말을 걸어도 모를 정도로 몰입할 수 있어요.”

5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김덕신 여사. 특유의 강인함으로 이겨냈다. 강정현 기자

Q : 주변 환우들에게도 큰 힘이 되겠네요.
A : “지금도 재활하러 가면 환우들이 ‘저도 용기를 얻었다’고 말씀해주실 때 참 기뻐요. 저도 아무것도 몰랐는데, 시작했다고, 여러분들도 어서 하시라고 말씀드리죠. 사실 제가 아프지 않았다면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요. 항상 바빴던 저에게 그림 그리는 기쁨을 찾고 과거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생긴 거예요. 감사한 일이에요.”

김덕신 여사가 펴낸 책, 『물두멍에 담긴 기억들』. '물두멍'이란 옹기의 일종이다.


그의 이번 책은 100쪽 남짓으로 그가 직접 쓰고 그린 글과 수채화가 가득하다. 어린 시절 새어머니 아래에서 고생하던 이야기며 남편 옥바라지 등 다양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풀어낸다. 인생 평지풍파를 두고도 남 탓 보다는 자성을 하는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 묻어난다. 지난달 15일엔 자택이자 시부모님 기념관에서 가족과 지인을 초대해 출판 기념회도 열었다. 시부모님의 초상화가 내려다보는 자리에서 어울려 음악을 연주하고 손수 준비한 음식들을 나누는 자리였다.

지난달 15일 출판기념회 준비 중인 현장. 중앙 벽난로 위에 시어른들 초상화가 보인다. 김덕신 여사 제공

Q : 고생 참 많이 하셨는데 표정은 평온 그 자체이십니다.
A : “(웃으며) 제가 이 나이 되도록 노안이 안 왔고 시력이 좋아요.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하죠. 젊었을 떄 하도 많이 울어서 눈이 맑아져서 그런가 보다. 그런데요, 고생한 것들 모든 것도 지나고 보면 다 즐거운 추억, 아름다운 이야기에요. 저는 핍박을 받으면, 고생을 하면 더 힘이 났어요. 저희 집안이 20선이다 그렇게들 말씀해주시지만, 사실 낙선도 20번 이상 했지요. 여러 말 못 할 사정도 많았고요. 책에도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뜻하지 않게 다치는 사람들이 또 나올 수 있잖아요. 그건 원하지 않았어요.”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학생을 추모하는 이태영 박사(왼쪽)와 김덕신 여사. 김덕신 여사 제공


곧 팔순을 바라보지만 그의 계획은 끊임이 없다. 앞으론 유화에도 도전하고, 그가 좋아하는 옹기 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도 힘쓰고 싶다고 한다. 왜 옹기일까. 그는 “백자에 비해 홀대받았지만 우리의 일상과 함께 해온 소중한 물건 아니냐”며 미소 지었다. 그는 평생 200점 넘는 옹기를 수집해 모교인 이화여대에 기증하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뭔지 물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남편이 당선되고 나선 지역구 목욕탕에 가는 것도 조심스럽잖아요. 일부러 멀리, 저를 모르시는 곳에 갔는데 어떤 세신사께서 어느 동네에서 왔는지 물으시더니 그러는 거예요. ‘그 정대철이라는 분, 도와주세요.’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참 고마웠죠. 그 순간이 잊히질 않습니다.”
마침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살짝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양해를 구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강산은 여러 번 바뀌었어도 서로 공경하는 마음은 변치 않은 듯했다. 살짝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다음 생에도 다시 같은 남편과 결혼하겠냐고. 그는 활짝 웃더니 “남편도 저도 서로에게 고맙다고 해요. 서로 말 잘 들어주고 받아주고 하면서요.”

젊은 시절의 김덕신 여사.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중앙포토]


젊은 세대도 기성세대도 다 힘든 시대, 지혜를 청하자 잠시 침묵한 뒤 이렇게 말했다.
“모든 건 지나고 나면 아름다워요. 고통스러워도 결국 모든 건 다 지나갑니다. 인생이 말이죠, 참 별 거 아닙디다. 조금만 견디면 순간이에요.”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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