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식의 레츠 고 9988] 아내 암 치료비에 전세금까지…국민연금 헐어쓰는 고령자들

신성식 2022. 11. 2.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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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서울의 한 임대아파트에 사는 A(65)씨는 월 60만원의 국민연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한다. 아파트 최초 계약 기간 만료를 앞두고 집주인이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은행을 노크했으나 기존 대출금이 있어서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고민하던 중 주변에서 국민연금공단의 노후긴급자금 대부제도를 알려줬다. 가까운 연금공단 지사를 방문했고, 1000만원 대출을 받아 보증금을 해결했다. 이 제도는 일종의 연금 담보 대출인데, A씨는 매달 받는 연금으로 갚고 있다. 그는 “은행 문턱을 넘기 어려운 고령자에게 연금공단에서 목돈을 빌려주니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한다.

B씨는 실직하면서 예정 나이(만 62세)보다 앞당겨 국민연금을 받고 있다. 일찍 받는 대신 연금액이 깎였다(최대 30% 삭감). 그러다 지난 7월에 일자리가 생겨 조기노령연금이 나오지 않게 됐다. 새로 들어간 회사와 잘 맞지 않아 9월 그만뒀고, 또 실직자가 됐다. 소득이 없어지면서 조기노령연금을 다시 받게 됐다.

「 고금리·경제난 국민연금대출 인기
최대 30% 깎는 조기연금도 증가
“대출 요건 완화” vs “강화해야”
전문가 “빈곤층 기초연금 늘려야”

경제가 악화하면서 생계난에 시달리는 고령자들이 노후의 최후 보루인 국민연금을 헐어 쓰기 시작했다. 국민연금을 담보로 급전을 빌리거나 연금액 삭감을 무릅쓰고 수령 시기를 앞당긴다. 27일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올해 1~9월 노후긴급자금 대출(일명 실버론)을 받은 사람이 5555명에 달한다. 2020년 7883명, 지난해에는 8326명이었다. 60세 이상의 국민연금 수급자(수령자)가 실버론을 이용하면 자신의 연간 연금액의 두 배(최대 1000만원)까지 빌릴 수 있다. A씨는 연간 연금액이 720만원이라서 대출 한도인 1000만원을 빌렸다.

3년새 2만여명 대출, 연금으로 갚는 중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전·월세 보증금, 의료비, 배우자 장례비, 재해복구비 용도로만 빌릴 수 있다. 소득·재산·신용등급 등을 따지지 않는다. 신규 전·월세 보증금을 빌리려면 임차개시일 전후 3개월 이내임을 입증해야 한다. 진료비는 진료일에서 6개월 이내만 가능하다. 전체 실버론 대출금의 71.5%가 전·월세 보증금, 26.4%가 의료비에 쓰인다. 최근 몇 년새 가파르게 부동산 가격이 오른 데다 경제난으로 목돈이 필요해진 고령층이 많다는 뜻이다. 이자는 5년 만기 국고채권 수익률(올 4분기 3.4%)이다.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4~5%대인 점을 고려하면 이자가 매우 저렴하다. 빌린 돈은 최대 5년간 원금 균등분할 방식으로 상환하면 되며, 대개 연금액으로 갚는다. 큰 병이 났을 때 목돈을 마련하기 쉽지 않아 국민연금 대출에 의지하기도 한다. C씨는 암에 걸린 아내의 항암 치료비가 1000만원 넘게 나오자 실버론을 받아 충당했다.

올해 들어 국민연금을 최대 5년 앞당겨 받되 1년마다 6%p, 최대 30% 깎이는 조기노령연금 수급자도 늘었다. 민주당 최혜영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조기연금 신규 수급자는 올해 월평균 4829명(1~6월 기준)이다. 2019년 4467명, 2020년 4324명, 지난해 3976명으로 줄었다 올해 늘었다. 경제난에다 9월 건강보험 부과체계를 개편하면서 피부양자 탈락을 면하기 위해 조기연금이라는 ‘삭감 수령 방식’을 선택한 사람도 있다.

D(61)씨는 정식 연금수령 시기(62세)보다 앞당겨 매월 50만원의 조기노령연금을 받고 있다. 정식 연금보다 6% 깎였다. 그러던 중 지난여름 집중호우로 집이 침수돼 임시주거시설에서 생활했다. 집을 복구하는 데 정부 지원금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은행을 찾았으나 대출 한도가 이미 찬 상태여서 불가 통보를 받았다. 그는 지자체에서 피해 확인서를 떼서 연금공단에 제출했고, 긴급자금 대출 1000만원을 받아 집을 수리했다. 매달 나오는 연금액으로 빚을 갚고 있다.

저소득층에 기초연금 두텁게 해야

당장 생계 위협을 받는 사람은 과거 보험료를 돌려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해외 이민 등을 제외하면 불가능하다. 1988년 연금제도 도입 후 98년까지 실직 후 1년 지나면 그간 낸 보험료를 일시금으로 탔다. 1998~2000년 실직자 700여만명이 반환일시금을 타갔다.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나마 이런 요구에 부응하는 제도가 긴급자금대출이다. 하지만 요건이 까다롭다는 항의가 적지 않다. 연금수급자 김모씨는 “전·월세 보증금 대출 가능 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진료비는 진료일 6개월 이내에서 1년 이내로 확대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왜 60세 이상만 되는지 항의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노후 소득 전문가의 시각은 다르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당장 급하니 어쩔 수 없이 긴급자금 대출을 받고 조기연금을 쓰지만, 얼마 안 되는 연금을 헐어 쓰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라며 “긴급대출 한도를 좁히는 식으로 요건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 박사는 대신 “기초연금이 저소득 노인에게 더 많이 가게 개혁해야 한다”고 말한다. 기초연금은 65세 이상 하위소득 70% 이하 노인에게 월 30만 7500원이 일률적으로 지급된다. 빈곤선(소득 하위 40%) 이하 노인에게 40만원이나 50만원을 지급하고, 그 위 계층은 좀 줄이자는 것이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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