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느낌의 세계, 새 피 뿜는 심장처럼 항상 변해야"
한글 글자를 활용한 그림 덧붙여 "국내 최초 작업"
"호저는 가시로 찔러/ 치타도 찔러/ 표범도 찔러/ 괴롭히면 다 찔러// 호저를 우습게 봤다간/ 큰코다쳐/ 사자야/ 너도 코 찔렸지/ 거봐 그럴 줄 알았어// 호저 우습게 보면/ 큰코다친다니까".
최승호 시인이 '한글그림 동시집'이라는 알쏭달쏭한 부제를 붙여 최근 출간한 『물땡땡이들의 수업』(상상)에 나오는 '큰코다친 사자'라는 작품이다. 호저는 고슴도치 비슷한 동물. 시어 "찔러"의 반복에서 음악성, 맹수들이 그깟 가시 달린 작은 동물에 쩔쩔매는 장면이 연상돼 웃음마저 자아낸다. 그런데 시가 인쇄된 면(18쪽)의 오른쪽 면에 수상쩍은 이미지가 보인다. "사자"라는 단어를 깨알 같은 크기로 반복 배치해 얼추 왼쪽 면 호저 가시에 코를 찔린 사자를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여기까지, 그림까지 훑으면 부제의 비밀이 풀린다. 한글 글자를 그림 재료로 활용한 이미지를 곁들였다고 한글그림 동시집이다. 최씨에 따르면 "국내 시인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는 최초의 작업", "의미의 무게에 짓눌릴 대로 짓눌린 아이들을 그로부터 해방시키는 작업"이다.
이번 동시집 안에서 최씨의 '일탈'은 이게 다가 아니다. 29쪽에는 19쪽 사자 그림에 색까지 입혔다. 보다 본격적인 그림이다.
이런 최씨의 작업은 『대설주의보』(1995년)나 『그로테스크』(1999년) 같은 그의 젊은 날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여전히 낯설다. 세월 따라 시적인 진실도 변하는 것인지. 어딘가 병적이고 문명비판적이던 그의 세계는 2000년대 중반 베스트셀러 말놀이 동시집 시리즈(전 5권)를 내며 완연히 밝아진 느낌이다. 말놀이가 시의 어쩔 수 없는 음악성에 주목했다면 이번 그림시집은 말 그대로 시의 회화성, 시가 품은 이미지를 구체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천생 시인 최승호는 왜 뒤늦게 말놀이, 그림놀이에 빠진 것일까.
"아우 나는 재미있지." 이런 작업 자체가 즐겁다는 얘기다. 최씨는 대학시절(춘천교대) 화가지망생이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수십 년 만에 직접 그린 그림을 책에 싣는다고 생각하니 가위눌려 잠을 못 잘 지경이었다. 실패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이들처럼 그리면 되지." 이렇게 생각하니 좀 편해졌다.
아이들도 좋아하더라고 했다. 기자를 만나기 며칠 전 한 행사장에서 아이들에게 흑백 한글그림을 쥐여주고 색칠을 하게 했다. 아이들은 주어진 형상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았다. 형상 바깥으로 수시로 튀어나가 색칠을 했다.
최씨는 예술은 "느낌의 세계"라고 했다. 그러니 무엇보다 정체되지 않아야 한다. 한순간의 느낌을 포박해 고정시킨다면 그걸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심장은 계속해서 새 피를 만들어내잖아요. 심장과 비슷한 게 태양이죠. 태양이 우리에게 쉰 햇빛을 주진 않잖아요. 바다도 늙지 않죠. 바다 안에 쟁기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늘 바다를 갈아엎죠. 그게 파도고요. 나는 예술가도 언제나 새 피를 뿜어내는 심장처럼 자기 갱신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죽기보다 싫은 게 변화다. 사람들은 안주를 사랑한다. 예술가들이라고 다를까.
최씨는 "그러려면 자기를 좀 비워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아상(我相)이 강하면 동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내가 어린아이의 천진성, 장난기로 접근하는지 신경을 쓰면서 동시를 쓴다"고 했다.
그가 계속해서 동시집을 내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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