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과실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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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애 기자]
다양한 과실수를 보며 자랐다. 집 입구에는 커다란 호두나무 두 그루, 내 방 옆에는 오래된 감나무가 있었다. 땅에 떨어진 호두를 주워 속살을 까먹고 대나무 장대로 감을 따던 추억이 아련하다. 마당에 석류, 무화과, 앵두, 산수유나무도 있었다. 알알이 열매가 굵어지고 농익는 장면을 가까이에서 보는 일이 즐거웠다. 열매를 따 먹을 때는 훨씬 더 즐거웠다.
밭에는 복숭아나무와 포도나무가 자랐다. 옆으로 벌어진 복숭아나무는 흔들말처럼 타기 좋았다. 새콤달콤한 복숭아는 그냥 먹기보다 잼이나 설탕 조림으로 만들어야 맛있었다. 포도나무는 순치기를 잘해주면 풍성한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열려 점점 아래로 드리워졌다. 한여름 포도밭을 거닐며 상품의 가치가 없는 송이의 검은 포도알을 하나씩 톡 따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포도나무가 있기 전에는 오디가 열리는 뽕나무가 있었다. 부모님이 양잠업을 할 때 누에 먹이로 심었던 뽕나무는 나무를 잘라낸 자리에 뾰족한 둥치가 남아서 위험했고 한번은 엄마가 거기에 발을 다치기도 했다. 양잠업을 그만두면서 뽕나무 대신 포도나무를 심었다.
포도나무를 뽑아낸 후 아버지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대추나무를 심었다.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는 아버지였다. 대추나무는 손이 많이 가지 않는 대신 돈이 되지 않았고 몇 년 뒤에는 그마저도 뽑히는 신세로 전락했다.
개울 건너편에는 청포도나무와 단감나무가 있었다. 싱그러운 초록 포도가 새콤하지 않고 달콤한 맛이 나는 게 신기했다. 단감나무는 청포도밭의 경사진 밭둑에 있었다. 가을마다 큰 바구니를 꽉꽉 채울 만큼 많은 양의 단감이 열렸다. 포도나무를 뽑아낼 때 이 밭에 있던 나무들도 정리됐다.
벼와 채소 농사를 주로 하시던 부모님이 본격적으로 과수원 농사를 시작했다. 과수원으로 이용된 해송밭에는 신고, 원황, 황금배 등이 주로 있었고 일부 면적에 부사, 아오리, 홍옥 같은 사과도 있었다. 과수원 입구 둘레에는 단감나무와 두릅나무가 자랐다.
벚꽃이 필 즈음에는 배꽃도 흐드러지게 폈다. 하얀 배꽃이 가득한 배밭은 벚꽃놀이 저리가라 할 만큼 멋졌다. 나무를 전지하고 접붙이고 꽃을 따고 열매를 솎아내고 봉지를 싸고 약을 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맛볼 수 있는 배는 꿀맛이었다. 물이 많고 달고 부드럽고 알이 굵은 배였다. 어린아이 머리만큼이나 큰 배도 가끔 나왔는데 먹기 아까워 장식용으로 전시할 정도였다.
대가족 먹여 살리고 동생들, 자식들 결혼시키느라 궁핍했던 살림살이가 과수원을 하면서 조금씩 폈다고 한다. 돈이 되는 만큼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주말에 자식들이 와서 돕는 것만으로는 일손이 부족해 늘 놉을 해야 했다('놉하다'는 경주 방언; '일꾼을 사다'라는 뜻).
배밭 일을 하면서 아빠의 손마디는 더 굵어졌고 엄마는 목디스크를 얻었다. 마을이 고령화되면서 놉을 할 인력은 점점 줄었다. 배나무가 오래되면서 배의 당도가 떨어졌고 과육도 거칠어졌다. 부모님도 예순을 넘어 일이 힘에 부치는 나이였기에 과수원을 정리했다. 이제 본가에 남은 과실수라고는 마당 모퉁이의 보리수와 무화과, 블루베리 나무와 비어있는 밭 한쪽에 서 있는 감나무가 전부다.
올여름 지독한 태풍 두 개가 한반도를 지나갔다. 가을철 수확물이 걱정되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여느 때만큼이나 풍성한 가을이다. 지난주에는 사과 따기 체험을 다녀왔다. 선선한 가을날을 만끽하며 빨갛고 큰 사과를 골라 땄다. 네 명의 손이 닿으니 바구니가 금세 찼다.
수확의 계절에 사방이 사과나무로 가득한 밭에서 우걱우걱 직접 딴 사과를 먹던 남편이 은퇴 후 작은 과수원을 운영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사과나무 몇 그루, 감나무 몇 그루, 블루베리 몇 그루... 함께 농사지을 자신은 없지만 남편이 직접 키운 과일을 맛볼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남편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그때까지 우리가 건강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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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주간지 [서산시대]에 동시기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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