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광이 사람 잡아먹는다', 대가족에 닥친 재앙

김상목 2022. 11. 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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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소개] <알카라스의 여름>

[김상목 기자]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 포스터
ⓒ 영화사 진진
 
세계사 시간에 '인클로저 운동'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테다. <유토피아>를 썼던 토마스 모어가 당대 영국 사회 현실을 풍자하기 위해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표현했던 바로 그 '인클로저'다. '인클로저'의 의미는 간단하다. 그전까지는 농촌의 마을공동체가 함께 이용하던 공유지에 경계선을 긋기 위해 울타리를 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물론 영국에서는 인클로저 현상으로 전체 산업 생산력이나 경쟁력이 대폭 상승되었다. 하지만 급격한 변화 과정에서 오랫동안 농촌 사회의 하층을 형성하던 가난한 농민들에게 희생이 전가되었고 수혜는 지주나 영주의 몫으로 독점되었다.

빈농들에게도 개방되었던 공유지가 울타리로 둘러싸여 봉쇄된 건 치명타가 되었다. 가난한 농민들이 겨울을 나기 위한 난방용 땔감 채취나 소작하는 토지세를 내기 위해 기르던 가축의 먹이를 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불만이 축적되자 곳곳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지만 기득권층의 일치단결로 저항은 분쇄되고 소작농일지언정 오랜 기간 마을공동체의 보호를 받던 이들은 이제 떠돌이 일당 노동자로 몰락해 일자리를 찾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실은 인클로저 현상은 영국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불과 반세기 전에 한국 사회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바로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이다. 건조하게 일자리를 찾아 농촌에서 도시로 나온다는 의미의 용어에는 그런 혼란과 비애가 곁들여져 있다. 과거에는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비유했지만 20세기 후반에 3세계 곳곳에선 친환경 바이오 연료의 재료가 되는 지평선을 뒤덮은 옥수수 농장이 양의 자리를 대신했고, 21세기에는 태양광 발전이 새로운 양으로 탄생했다. 이러한 식의 가혹한 흐름은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양상은 다양하지만 가장 위태롭게 삶을 영위하던 이들이 희생자가 되는 건 동일한 패턴이다.

이 가족이 사는 법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 스틸컷
ⓒ 영화사 진진
 
카탈루냐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는 3대째 복숭아 농사를 짓는 대가족이 있다. 하지만 영화 시작과 함께 이 가족은 몇 세대를 거듭하며 터전으로 삼아온 농장의 지주가 자신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몇 대 전 선조들이 구두약속으로 허락한 토지 경작권이 공증된 계약서 한 장 없다는 것 때문에 순식간에 무력화된다. 대를 이어 가족의 생계수단이자 보금자리가 되어줬던 가족농장은 더 나은 수익을 얻기 위한 지주의 태양광 발전 투자 때문에 곧 사라질 운명이다.

처음에 가족들은 지주의 인정에 호소한다. 1930년대 잔혹했던 스페인 내전 시절 지주이기 때문에 처단될 위기에 처했던 그들의 선조를 이 가족의 선조들이 구해낸 인연을 잊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농장에서 딴 제철 과일과 채소를 싣고 까마득하게 어린 지주의 집에 가 사정하길 반복한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야 하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거대 유통자본에 의해 저가격으로 팔려야 하는 농산물의 수익성은 점점 악화되어간다. 아프리카에서 지중해 건너온 저임금 이주 노동자들을 계절노동자로 수확기에 고용하던 가족농장은 형편이 어려워 인건비 지출을 감당하지 못한다. 결국 뙤약볕에 고된 수확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 여자와 아이들까지 내몰린다.

날이 갈수록 점점 악화되는 상황에 가족공동체 내에는 이견과 반목이 심화된다. 체념하고 살 길을 타협해 찾자는 의견과 우리가 할 일은 열심히 농사짓는 것뿐이라는 입장이 충돌한다. 그동안 크게 부각되지 않던 균열의 불씨들이 하나둘 어려운 상황에서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한다. 어른들은 한없이 심각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천진하다. 한 세기 가깝게 유지해온 가족농장이 이 가족에겐 영원불멸한 세계와도 같았기 때문에 강요된 변화를 납득하거나 수긍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 세계 외엔 아무것도 경험해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한여름의 농사일은 바쁘다. '속도전'을 하듯 2인 1조 중 누가 빠르고 정확하게 과일을 따는지를 놓고 경쟁이 벌어지고, 한 구석에선 농땡이를 부리는 이들의 눈치싸움이 치열하다. 그런 와중에도 각자의 고민은 이어진다. 대가족의 가장이 겪는 어깨의 중압감은 온몸이 삐걱대는 와중에도 보이지 않는 채찍처럼 그를 일터로 내몬다. 사춘기 고민이 시작된 자녀들 각자의 단면들, 사람들의 선의만 믿다 자손들을 길바닥에 내몰게 되었다는 노인들의 한탄이 교차된다. 영화 내내 이 가족은 서로 갈등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상황을 반복한다. 그런 가운데 이제 그들에게 토지 사용이 합법적으로 허가된 한도인 수확기가 점점 다가온다. 그렇게 알카라스 마을의 어느 대가족에게 찾아온 늦여름 한철이 흘러간다.

가슴과 머리로 받아내기 위한 '태세'가 필요한 영화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 스틸컷
ⓒ 영화사 진진
 
어떤 영화는 이해하기 위해 머리가 혹은 가슴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차가운 이성과 지식이 받쳐줄 때 작가의 의도에 온전하게 도달하는 영화가 있고, 따스한 감성과 연민이 솟아오를 때에만 도착 가능한 영화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둘을 모두 겸할 때 가치가 극대화되는 경우도 드물게 등장하곤 한다. 2017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프리다의 그해 여름>으로 인상적인 데뷔작을 선보였던 카를라 시몬 감독의 신작 <알카라스의 여름>은 그런 흔치 않은 사례에 속할 것이다.

영화는 제목이자 배경인 '알카라스' 지방에 대한 송가와도 같다(국내에선 감독의 전작과 연결시키기 위해 <알카라스의 여름>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지만 스페인어 원문 제목은 심플하게 지명인 '알카라스'로만 명명되어 있다). 감독은 어릴 적 휴가와 명절을 해마다 이 지방에서 보냈던 추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와 여러 삼촌들은 시골마을에서 과수원 농사를 생업이자 천직으로 살아왔다. 그들에겐 자신들이 경작하는 토지와 수고의 결실인 작물에 대한 자긍심이 넘쳐났다고 한다. 이 영화의 주역인 대가족은 그런 감독의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반영한 셈이다.

이런 유·청소년기 자전적 체험담을 영상화하는 작업은 사실 국내에서도 요즘 드물지 않다. 자기의 유년시절 추억은 비록 상실과 슬픔이 있더라도 적당히 미화하게 마련인지라 종종 그런 작업의 한계를 지적하곤 했다. 하지만 <알카라스의 여름>은 그런 향수 어린 추억담에 그치지 않는다. 감독은 자전적 체험담에 더해 21세기 현재에 농민들이 처한 상황을 결합시킨다. 감독이 누렸던 풍요로운 농촌과 자긍심 넘치고 토지에 애착을 가진 농민들은 이제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그 자리를 대기업과 부동산 개발이 차지하고 과거 이 땅의 주인공들은 소멸해간다.

알카라스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자신들의 상황은 물론, 현재 전 세계의 농촌들이 겪는 공통 문제를 내세우며 사회적 시선을 투영한다. 대량생산을 위해 기계를 도입하고 저임금 노동력에 의지하는 가운데 농촌의 목가적 풍경은 점점 황량한 공장지대처럼 변해버린다. 이는 농업의 근본과 배치되는 불합리한 흐름이지만 우리는 어느새 농업이 견지해온 출발점을 망각해버린 상태다. 감독은 그런 우리의 무관심을 지적한다.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누구에게나 가족이 있고 모든 나라에 농업이 있다. 이것은 보편적인 주제"라는 확신이 영화 전체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가족 중심의 소농은 지난 수천 년간 인류문명을 지탱해온 핵심 기반이었음에도 이제 대규모 유통과 치솟는 생산비용을 견디지 못하고 소멸해가는 중이라는 것을 <알카라스의 여름>은 스크린 가득한 풍경으로 소환한다.

물론 농민들의 저력은 끈질긴 저항으로 발현되는 중이다. 영화 속 농민들의 시위처럼 대기업의 횡포에 그들은 본능적으로 저항하고야 만다. 하지만 그런 절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호소에 응답하는 메아리는 통 들려오지 않는다. 반면에 반대편의 대응은 은미하고 신속하게 진행되는 중이다. 수익성이 낮아진 시골의 토지를 이용해 더 많은 이익을 얻길 꾀하는 기득권층의 계획은 그런 농민들에게 결정타를 날린다. 대가족의 선조들이 20세기 전반, 스페인을 휩쓴 내전의 참상 속에서도 인정을 발휘해 지주 가족을 구명해줬건만, 이제 지주의 후손들은 '안 되긴 했지만' 과거의 보은은 이제 의미가 없다고 외면해버리는 셈이다.

영화 후반이 되면 이 재앙의 원인 격인 지주는 더 이상 실체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 빈자리엔 과일나무를 갈아엎기 위한 불도저와 비옥하던 땅을 뒤덮는 태양광 패널들만 물귀신처럼 가족 주변을 어른거릴 뿐이다. 이제 농민들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 자신들이 경작하던 땅을 빼앗은 태양광 패널 관리자로 전직하거나 도시로 떠나느냐 양자택일에 내몰린다. 스페인 알카라스의 스산한 상황은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도 지방 소멸, 농촌 공동화 현상 등의 용어로 보편화되는 중이다.

가족 공동체의 순기능이 드러나는 이 영화의 매력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 스틸컷
ⓒ 영화사 진진
하지만 그런 처연함 속에서도 영화는 기이한 매력을 발산한다. 분명 (일종의 집단 주인공인) 영화 속 대가족이 처한 상황은 그들 공동체의 운명을 송두리째 붕괴시킬 것이다. 하지만 가업인 복숭아 수확을 앞둔 카탈루냐 지방의 작열하는 여름 더위가 기묘하게도 영화에 원초적 생명력을 부여한다.

물론 영화는 애써 억지 해피엔딩을 만들 낌새는 전혀 없어 보인다. 주인공들에게 결코 하늘에서 행운이 느닷없이 떨어질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 하지만 주인공 가족은 그저 무기력하게 사라지는 존재들이 되진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안도감이 관객들에게 공유된다. 어려움에 처한 상황이긴 하지만 어떻게든 이들은 끈질기게 저항하며 버텨낼 것이라는 믿음을 관객에게 영화가 자연스럽게 불어넣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감은 '가족'이란 인간이 형성해온 가장 원초적 형태의 공동체에 대한 신뢰에 기인한다. 장단점이 뚜렷하지만 그중 순기능만 남긴 것 같은 알카라스 가족농장 식구들이다.

영화 속에서 형상화된 이 대가족은 결코 단일한 집단으로 뭉뚱그려지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 각자의 얼굴에는 각기 다른 표정이 있고, 동일한 원인에서 출발하지만 그들의 고민에는 각기 다른 단면과 색채가 있다. 그런 형상화가 본 작품이 식상하지 않게 주제를 전달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비장의 카드인 셈이다. 처음에는 거친 시골에서의 삶이 꽤나 '마초' 분위기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3대에 걸친 이들 가족 내에는 그렇게 단순화시키기 어려운 구석이 잔뜩 있었다. 3대 간에 벌어지는 세대차이는 물론이거니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불안과 해법에 대한 상이한 입장이 용광로처럼 꿈틀대는 중이다.

그렇게 시작된 차이는 종종 갈등으로 증폭되어 때로 보는 이들도 조마조마해지는 상황에 종종 봉착하고 만다. 하지만 그런 실태를 남김없이 끄집어내 보여주면서도 그들이 공유해온 시간의 무게, 노동과 긍지로 유지해온 한 세기의 축적된 지층이 끈끈한 유대감과 신뢰를 발휘하게 견인한다. 그 덕분에 이 대가족은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대오를 유지한 채 견뎌내는 데 성공한다.

부당한 세계에 맞서는 과정이 거대한 풍경화로 그려지다
 
 영화 <알카라스의 여름> 스틸컷
ⓒ 영화사 진진
<알카라스의 여름>은 감독 본인이 베를린국제영화제 최고상 수상 직후 소감에서 "매일 땅을 경작하여 과일이 우리 접시에 닿도록 하는 작은 농가에게 이 상을 바친다"고 밝혔던 것처럼 세상의 이치와 정의에 대해 탐구하는 영화다. 하지만 대의명분을 소리 높여 외치는 대신에 감독은 지극히 개인적-가족적인 형태로 이야기를 풀어내 전달한다. 그렇게 관객에게 접근해오는 영화 속에서 한 가족이 무너지지 않고 견고하게 버티는 묘사는 얼핏 그저 지루한 일상물처럼 보이지만 서서히 가랑비에 옷이 젖듯 스며드는 효과를 발산한다.

그런 인내심 가득한 접근법에는 영화가 견지하고 있는 신념, 즉 인류의 역사를 지탱해온 농업과 농민들의 숭고함에 대한 긍정이 일체화된 형태로 담겨 있다. 아울러 감독과 제작진이 가진 믿음, 즉 세상을 휩쓰는 불의가 결코 영속될 수 없다는 굳은 의지가 가족들이 펼치는 다양한 '저항의 형태'들로 구현되고 있다. 이들이 각자 드러내는 별것 아닌 듯해 보이는 실천들은 조합해보면 총체적 삶의 투쟁으로 취합되곤 한다. 이 평범하고 태평해 보이는 사람들은 그저 물리적인 투쟁을 넘어 공동체에 대한 신뢰와 의지를 통해 '다른 세계'를 살아내는 이들인 것이다. 

이들의 일상 풍경에서 드러나는 카탈루냐 지방 고유의 노래와 이들이 선보이는 전통풍속, 여러 생활문화들에서는 그들이 대를 이어가며 고수해온 마을공동체의 역사가 짙게 묻어난다(그래서 영화 속에서 자막으로 나오는 노래 가사에도 관심을 가지길 권한다). 이 가족들이 살풍경한 글로벌 자본주의에 맞서는 일체감의 근본은 치열한 사회과학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런 삶의 학습된 방식과 경험에 기반을 둔 것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들의 처지가 위태로운 것을 영화는 감추지 않는다. 영화 초반에 과수원을 망치는 토끼 떼에 맞서 가족들은 엽총을 들고 토끼사냥에 나선다. 과일나무 아래 곳곳에 토끼 사체가 즐비하게 펼쳐진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온 이주노동자는 토끼의 유해를 수습하던 어린 손녀들에게 자신들의 방식으로 애도하는 법을 전수해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내몰리고 박해를 당하는 토끼에게 이들 가족의 초상이 겹쳐진다. 그렇게 말없이 전해지는 무언의 메시지가 제법 강렬하다.

감독은 대사나 사건의 연쇄에 손쉽고 안일하게 스토리텔링을 맡기지 않는다. 대신에 그냥 보면 모호하게 느껴지기 쉽지만 정교하게 세공된 상징과 암시, 사이사이 행간에 숨겨둔 장치와 미장센을 조밀하게 조직해 이 시대 전 세계를 휩쓰는 소농들의 수난을 거대한 추상 풍경화로 완성해낸다. 그런 감독의 스케일 거대한 설계 덕분에 관객이 안일한 태도로 일관하거나 게으름을 피운다면 영화에 감춰진 많은 것들을 그만 놓치고 말 테다. 하지만 집중력과 호기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견뎌낼 수 있다면 '시네마틱'한 체험과 더불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직면한 동시성에 대한 통찰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작품정보>
알카라스의 여름 Alcarràs
2022|스페인, 이탈리아|드라마
2022.11.03. 개봉|120분|12세 관람가
감독 카를라 시몬
주연 조르디 푸홀 돌체트(키메트 역), 안나 오틴(돌로르스 역),
       알베르트 보쉬(로제르 역), 세니아 로제트(마리오나 역),
       아이네트 주누(이리스 역), 몬세 오로(나티 역),
       카를레스 카보스(시스코 역),
       조엘 로비라&아이작 로비라(쌍둥이 형제 페레&파우 역),
       베르타 피포(글로리아 역), 요셉 아바드(로헬리오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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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
2022 70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루라-그린피스상
2022 27회 부산국제영화제 월드 시네마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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