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승의 역사 속 장소 이야기⑤] ‘문화통치’라는 허울 뒤의 일제 침탈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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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무르익어 가면서 길가의 가로수도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재판 받기 위해 이 건물을 마주한 조선인은 마치 오래전부터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였고, 이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은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고자 하는 일제의 의도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주변에 남아 있는 일제 침탈의 흔적 역시 때에 따라서는 우리의 미래를 쌓아가는데 방향을 잡아 줄 수 있는 초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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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무르익어 가면서 길가의 가로수도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정동길)은 도심 속에서 단풍의 멋을 한눈에 즐길 수 있는 곳 중의 하나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그 길가에 자리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중앙 입구 옆에 있는 머릿돌을 살펴보면 건물의 연혁을 짐작할 수 있다. ‘定礎 昭和二年十一月 朝鮮總督 子爵 齋藤實’(정초 소화이년십일월 조선총독 자작 재등실)이라고 씌여있다. 얼마 전 이토 히로부미가 쓴 글씨로 확인된 한국은행 본관 머릿돌은 정초(定礎)라는 글씨 이외 작성자 등 관련 내용이 지워진 반면 서울시립미술관 머릿돌은 그 내용이 온전히 남아있다.
머릿돌에 쓰여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1927년 11월 조선총독 자작 사이토 마코토’이다. 건물이 1927년 건립되었으며, 글씨를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가 썼다는 것이다. 사이토 마코토는 1919년 3.1운동 직후 조선총독으로 취임하였다. 이전 조선총독은 일본 육군 출신이었다. 하지만 사이토 마코토는 일본 해군 출신이었다. 3.1운동의 여파라고 할 수 있다.
사이토 마코토는 조선인의 저항을 무력화하기 위해 이전 지배 정책을 ‘무단통치’라고 규정하고, 이후에는 이른바 ‘문화통치’를 추진하였다. 이후 헌병경찰제도를 보통경찰제도로 변경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침탈정책을 미화하기 위한 기만적인 표현이었다. 당시 건립된 이 건물에서도 일제의 기만적인 모습이 녹아든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연구에 따르면 첫인상은 주로 얼굴 표정에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건물에서 얼굴 표정에 해당하는 것이 건물의 출입구로 이용되는 정면 외벽 부분에 해당하는 파사드(Façade)이다. 사실상 파사드는 건물의 외피를 의미하기 때문에, 건축에서 파사드의 목적은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서울시립미술관에 대한 첫인상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관공서 같은 모습이었다. 건물 정면에 돌출된 차량 진입용 현관(Porte-Cochère)의 흰 화강암은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외벽의 갈색 타일과 어우러져 보는 이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위축시킨다. 무미건조한 좌우 대칭과 정렬된 창문 그리고 정면의 아치는 이 건물이 그 자리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특히 지금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건립 당시에는 언덕 위에 자리하여 이러한 인상이 더욱더 강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재판 받기 위해 이 건물을 마주한 조선인은 마치 오래전부터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였고, 이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여기에 이 건물이 조선인을 위한 법원이라는 점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구성원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법원의 필요성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남아 있는 것은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고자 하는 일제의 의도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앞에서 언급한 한국은행 머릿돌에 지워진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처럼 과거를 눈앞에서 치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머릿돌의 본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 필요하다. 머릿돌은 집을 지을 때 방향을 잡거나, 이를 중심으로 짓는 용도였다. 머릿돌을 주춧돌, 모퉁잇돌, 초석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남아 있는 일제 침탈의 흔적 역시 때에 따라서는 우리의 미래를 쌓아가는데 방향을 잡아 줄 수 있는 초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soothhistory@nah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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