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애도는 3인칭의 죽음을 1인칭으로 바꾸는 통로

2022. 11. 1.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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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원·청란교회 목사, 동서대학교 석좌교수(가족생태학), 하이패밀리 대표

종교개혁 505주년을 기념하는 주일 아침, 이태원 비보(悲報) 앞에 망연자실이었다. 두 손을 모았다. 세월호 사건 때 ‘1분 1초의 초침을 멈추어 구조 시간을 연장’시켜 달라던 간구가 머릿속을 맴돌 뿐, 이번에는 심장 박동이 멈춘 듯 기도가 멈추었다. 가슴이 조여왔다. 검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나도 모르게 신음처럼 내뱉은 말이 있었다.

“주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 mei Deus).”

이미 사망자는 150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아니다. 지금은 오롯이 옷깃을 여미고 애도(哀悼)하고 슬픔을 나누는 일이다. 사랑하는 오라버니, 나사로를 잃은 마르다와 마리아의 눈물 앞에 예수님도 같은 눈물로 답했다. 그게 진정한 애도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대한항공기 피랍사고 후 영결 식장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자비로우신 주 하나님, 오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우리의 흐느끼는 소리 당신 앞에 이르게 하소서…주여, 당신께 원망하고 넋두리를 펴는 우리를 용서하십시오. 졸지에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아내와 남편, 부모형제를 잃은 유가족들의 비탄이 너무나 커서입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슬프고 괴로워서입니다…주여, 우리의 이 뉘우치는 마음을 보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어 이 영혼들을 당신 품에 안으소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고 그들을 인도하시어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 당신 생명의 나라, 빛과 평화의 나라로 인도하소서. 또한 비통에 젖은 유가족들을 위로하소서. 그분들의 마음속에 당신의 사랑을 가득히 부어 주소서.”

오늘, 우리의 기도는 김 추기경의 기도를 닮아야 한다. 기도 속에 담긴 공감(共感)과 위로, 성찰과 희망의 작은 불을 밝혀야 할 시간이다. 지금까지 여러 재난과 사건, 사고를 겪으면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죽음은 타자화되었다. ‘그들이’ 죽었을 뿐이다.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Vladimir Jankelevitch)는 이를 3인칭의 죽음이라 했다. 3인칭의 죽음은 여전히 나와 무관한 타인의 죽음일 뿐이다. 그는 2인칭의 죽음일 때 비로소 우리는 죽음을 경험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조차도 이내 잊혀지고 만다. 우리는 수없이 그것을 보았다. 이제는 1인칭의 죽음으로 환치해야 한다. 문제는 나의 죽음은 내가 경험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바로 이 거리를 좁혀주는 것이 애도다.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될 때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애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인간은 장례를 치르는 유일한 동물이다. 장례 속에 애도를 통해 비로소 인생의 끝을 바라보게 된다. 이래서 성경은 “잔치보다 장례식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 결국에는 우리도 장례식으로 인생을 마무리할 테니, 그곳에 가면 무엇인가 발견하게 될 것”(전 7:2)이라고 가르친다. 숱한 죽음 앞에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죽음은 헛기침을 하고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어디 그뿐이랴.

불과 두 달여 전, 우리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를 지켜보았다. 장례가 말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품격(品格)이었다. 소득 수준 1만 달러까지는 성실, 2만 달러까지는 기술, 3만 달러까지는 문화, 4만 달러부터는 품격이라 한다. 한 나라의 품격은 장례나 추도에서 절정을 드러낸다. 나는 그 품격을 조승희의 미국 버지니아 공대 총기사고에서 보았다.

조승희의 총구가 불을 뿜은 일주일 뒤, 버지니아 공대 드릴필드 광장에선 한인 기독 학생 30여명이 희생자를 위로하는 기도회를 열고 있었다. 희생자를 위로하는 추모석과 촛불, 꽃다발이 즐비했다. 살아있던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조승희 추모석 옆에도 애도 편지가 놓였다. “너를 돕지 못해 미안하다.” 애도 편지만이 아니었다. 버지니아텍에 놓인 조승희 추모석이 끝내 나를 울게 했다. “얼마나 도움이 필요했니….” 이래서 죽은 적(敵)은 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일게다. 그리고 추모의 글이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오늘의 슬픔은 당분간 계속되겠지만 우리는 눈물 없이 일어설 수 있을 만큼 강하다. 우리는 울지 않을 만큼 용감하고, 다시 웃어야 한다는 걸 알 만큼 슬프다.”

지금 우리의 형편이 그렇다. 참척(慘慽)의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을 유가족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제대로 된 애도인 것이다. 이스라엘 왕 사울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이 죽는다. 국론은 분열된다. 이때 다윗 ‘왕’은 스스로 상주(喪主)가 된다. 자연스레 국가장으로 승격된다. 왕은 무덤에서 ‘소리를 높여’ 운다. ‘애가’까지 짓는다. 애끓는 추도사다. 다윗 왕은 음식 먹는 것도 거부한다. 백성들은 왕의 진심을 읽는다.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한다. 왕권은 든든히 선다(삼하 3:1, 31~39).

애도가 빚어낸 공감 사회의 가슴 찡한 장면이다. 어린 아이들은 뜻밖에도 슬픔을 먹고 자란다. 기쁨이 아니다. 국가도 그렇다. 영연방의 왕권이 굳게 선 이유다.

이제라도 버려지고 잊혀지는 3인칭의 죽음을 1인칭으로 되살리자. 세계가 대한민국의 슬픔을 주목하고 있다. 이태원 사고로 빚어진 국가의 슬픔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윤석열정부의 미래가 있다. 윤석열정부가 꿈꾸는 공감 사회가 눈앞에 와 있다. 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그 품격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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