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기머리 사건'이 나주에서 일어난 이유

이돈삼 2022. 11. 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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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 장악한 영산포와 나주는 일제의 침탈 전초기지

[이돈삼 기자]

 옛 나주역 앞에 세워져 있는 학생독립운동 기념 조형물. 당시 학생들의 항일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 이돈삼
 
11월 3일은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이다. 예전엔 '학생의 날'이라 했다.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 항일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킬 목적으로 제정한 법정 기념일이다. 그때 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나주로 간다. 옛 나주역이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와 광주를 오가던 기차 안에서 벌어진, 이른바 '댕기머리 사건'이 계기였다.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 다나카 등 일본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과 이광춘, 이금자의 댕기머리를 당기며 희롱했다.

이 광경을 본 광주고보 2학년 박준채가 격분해 후쿠다를 꾸짖었다. 박준채는 박기옥의 사촌동생이다. 후쿠다가 '조센징'을 들먹이면서 한국과 일본 학생들의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억눌려 있던 한국인의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당시 모습 그대로의 옛 나주역 모습. 나주역사는 1913년 호남선 개통에 맞춰 지어졌다.
ⓒ 이돈삼
  
 옛 나주역의 내부 모습. 나주역이 옮겨지기 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 이돈삼
 
한국과 일본 학생들의 충돌은 다음날 통학열차 안에서도 이어졌다. 11월 1일엔 광주역에서 한국과 일본 학생들의 충돌이 일어났다. 3일 광주고보생들의 1차 봉기, 12일 2차 봉기로 이어졌다. 27일엔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 학생 봉기로 확산됐다.
광주 통학생 30명이 퇴학을 당했다. 감옥에 갇힌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럼에도 학생들의 봉기는 멈추지 않았다. 나주와 광주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항일운동이 전국적인 학생독립운동으로 번졌다. 광주학생 독립운동은 3․1만세운동, 6․10만세 운동과 함께 일제하 3대 독립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나주 영산포에 남아있는 일본인 대지주의 저택. 일제강점기 영산포에 들어와 산 일본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 이돈삼
  
 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의 내부. 당시 기차 안에서의 댕기머리 사건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 이돈삼
 
일제강점기, 영산포에 거점을 둔 일본인들이 나주평야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갔다. 상권도 일본인들이 장악했다. 학생들의 항일운동에는 식민지 백성의 가슴 아픈 현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울분을 삭이고 있던 나주 학생들의 피 끓는 가슴에 '댕기머리 사건'이 불을 지른 것이다.
사건의 현장인 옛 나주역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나주역사는 1913년 호남선 개통에 맞춰 지어졌다. 역사의 구조나 골조, 목재 등은 처음 모습 그대로다. 1970년에 일본기와를 골스레트로 바꾸고, 건물 밖에 있던 개찰구를 안으로 들였을 뿐이다. 나주역사 앞에 기념조형물도 세워져 있다.
  
 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 옛 나주역사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옛 나주역사 앞에 세워진 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 조형물의 밤 풍경. 10월 30일 댕기머리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학생들의 항일 독립운동을 표현하고 있다.
ⓒ 이돈삼
 
나주역사 옆에 학생독립운동기념관도 만들어졌다.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알 수 있도록 학생독립운동 과정과 식민착취 실태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여준다. 전시실은 2개로 꾸며져 있다.

1전시실에서는 일제의 호남 침탈, 침탈의 전초기지였던 영산포와 나주 이야기를 풀어간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이후 나주에서 일어난 의병활동과 일제의 탄압, 나주학생들이 학생독립운동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배경, 전개과정 등을 보여준다.

2전시실은 나주역 충돌 이후 들불처럼 번져 간 학생독립운동의 전개과정, 나주학생들의 봉기와 투쟁, 후손들의 증언 등으로 꾸며져 있다. 학생들의 체험학습 공간으로, 일제강점기 학생독립운동을 이해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1953년 광주일고에 세워졌다.
ⓒ 이돈삼
  
 광주 학생독립운동 기념관에 세워져 있는 기념조형물. 학생들의 하나 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 이돈삼
 
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은 광주에도 있다. 1953년 광주일고에 세운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에는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는 뜨겁고 강인한 외침이 새겨져 있다. 광주자연과학고와 광주교육대학교에도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전남여고에는 학생독립운동 여학도기념비와 여학도상(像)이 있다.

광주 화정동에 있는 학생독립운동 기념관에도 기념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관련 자료도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댕기머리 사건으로 시작된 학생들의 싸움이 항일투쟁으로 발전한 데는 장재성과 장석천의 남다른 역사인식, 성진회와 독서회 등 비밀결사의 역할까지 소개돼 있다.

장재성은 광주일고의 전신인 광주고등보통학교에 다닐 때 이미 광주지역 학생들의 사회과학 모임인 '성진회'를 만들어 민족해방과 계급문제에 대해 고민했다. 나주역 사건을 전해 듣고, '우리의 적은 일본인 학생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라며 11월 3일 시위를 준비한다. 11월 3일은 성진회 창립 3주년이자, 일본왕 메이지의 생일인 명치절이었다.
  
 장재성은 학생들의 사회과학 모임인 성진회를 통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당시 학생들의 모임장소로 쓰였던 장재성빵집이 있던 자리를 알리는 표지석이 광주 금남로공원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
  
 박정업은 3.1운동 때 앞장서 흔든 태극기. 나주에서 열린 해방 기념식에도 게양됐다. 남파고택에 보관돼 있다.
ⓒ 이돈삼
 
'댕기머리 사건'의 당사자인 박기옥과 박준채가 살았던 집이 나주 남파고택이다. 일본 남학생한테 머리채를 잡힌 여학생 박기옥, 일본인 학생을 꾸짖은 남학생 박준채가 이 집안 사람이었다. 이들은 남파고택에서 나주역을 오가며 기차를 타고 광주로 학교를 다녔다. 박기옥은 박정업의 동생 딸, 박준채는 박준삼의 동생으로 사촌이었다.

박정업은 남파고택에서 살고 있는 박경중의 증조, 박준삼은 할아버지다. 박정업과 박준삼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박정업은 3.1운동 때 앞장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그 태극기가 나주에서 열린 해방 기념식에도 게양됐다. 태극기는 지금 남파고택에 보관돼 있다.

박정업의 아들 박준삼은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21살 때 3.1운동에 참여해 옥살이를 했다. 1926년엔 나주청년동맹을 조직하고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해방 후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나주지회 위원장을 지냈다.

남파고택은 밀양박씨 청재공파의 종갓집이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초당채 등 8동이 남아 있다. 초당채를 1884년 박정업이 지었다. 안채는 박경중의 고조 박재규가 1917년에 지었다. 박재규의 호가 남파(南坡), 집이 '남파고택'으로 불리는 이유다.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남파고택의 초당채. 1884년 박정업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남파고택은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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