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도 미술도 음식도 멋졌지만…마드리드는 보행 천국이었다

최승표 2022. 11. 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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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마드리드 여행 ① 도심 산책


'데보드 신전'은 마드리드를 대표하는 일몰 명소다. 낮에는 산책과 피크닉을 즐기고 밤에는 낙조를 감상하기 위해 시민과 여행객이 모여든다. 최승표 기자
도시를 생각한다. 이태원 참사 때문일까. 살기 좋은 도시란 어때야 하나 고민한다. GDP가 높고 멋진 건물이 많은 것도 좋지만 안전하고 걷기 편한 도시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일 테다. 지난 10월 14~19일 스페인 마드리드를 다녀왔다. "바르셀로나, 그라나다, 세비야 등 기라성 같은 도시를 안 가고 수도에만 머물다니 안타깝다."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실은 닷새도 부족했다. 이 도시가 품은 웅숭깊은 이야기와 압도적인 미술, 질리지 않는 음식까지 알면 알수록 그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가장 인상적인 건 너른 녹지 공간과 시민을 배려한 널찍한 보행로였다. 코로나 사태 이후 달라진 마드리드의 구석구석을 두 발로 느끼고 왔다.

미술관보다 돈 잘 버는 축구장


레알 마드리드의 홈 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 축구경기가 없는 날에도 박물관과 경기장을 구경하기 위해 전 세계서 여행객이 모여든다. 최승표 기자
스페인을 안 가봤어도, 이 나라 수도를 몰라도 '레알 마드리드'는 누구나 안다. 레알 마드리드는 단순히 세계 최정상급 축구팀이 아니라 도시를 상징하는 브랜드다. 경기가 없는 날에도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구장'은 장사진을 이룬다. 경기장 관람을 위해서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에서 유니폼을 사는 사람들.
10월 15일 경기장을 찾았다. 암표상이 이튿날 열릴 FC 바르셀로나와의 빅 매치 티켓을 1000유로(약 141만원)에 주겠다며 꼬드겼다. 손사래를 치고 15유로짜리 경기장 투어 입장권을 샀다. 대기 줄이 수백m 이어져 있었다. 우승 트로피와 주요 선수의 유니폼이 전시된 박물관을 보고 관람석으로 이동했다. 공격수 카림 벤제마가 골을 넣고 8만 관중이 환호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관람 동선의 마지막은 기념품숍. 세계 각지에서 온 방문객이 값비싼 유니폼과 기념품을 주저 없이 구매했다. 경기장 투어 입장객 수가 프라도·레이나 소피아 미술관보다 적어도 수익은 훨씬 크다는 말을 이해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작품 '시녀들'. 프라도 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후대에 인상주의, 사실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사진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를 갔는데 프라도 미술관을 지나칠 수 없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고야 등 거장의 작품을 실물로 보니 미술관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겠다 싶었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특히 강렬했다. 가로 2.76m, 세로 3.18m의 17세기 작품은 요즘의 4K 영상보다 입체적이고 생생했다. 화폭 속 인물들의 눈빛에 붙들려 발이 안 떨어졌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공원과 거리


지난해 7월 미술관 옆 '프라도 거리'와 '레티로 공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스페인 49번째이자 마드리드 최초의 세계유산이다. 스페인은 이탈리아(58개), 중국(56개) 다음으로 유네스코 유산이 많다.
레티로 공원은 도심 한복판에 있는 시민 쉼터다. 인공 호수에서 보트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 최승표 기자
마드리드 시는 세계유산을 일컬어 '빛의 풍경'이라 한다. 이 거리와 공원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했고, 과학·예술·문학이 두루 융성했기 때문이다. 시벨레스 광장부터 아토차 역까지 약 1.4㎞ 이어진 프라도 거리에는 수령 수백 년의 플라터너스가 빽빽했다. 가이드 마리아는 "16세기, 펠리페 2세가 시민 누구나 산책하도록 만든 공간으로 유럽 최초의 가로수 길"이라고 설명했다. 프라도 거리 주변에는 3대 미술관(프라도·티센 보르네미사·레이나 소피아) 외에도 왕립 천문대, 헤로니모 성당 같은 유서 깊은 건물이 많다.
레티로 공원에는 멋진 건물도 많다. 19세기 후반에 만든 유리 궁전. 최승표 기자
레티로 공원은 지난 7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 참석차 마드리드를 찾은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도 산책한 곳이다. 면적(1.4㎢)이 서울숲 공원과 비슷한데 역사는 500년을 헤아린다. 16세기 초, 수도원 정원으로 조성한 뒤 여러 왕을 거치며 공원을 확장하고 별궁도 지었다. 귀족들만 이용하던 공원을 시민에게 개방한 건 약 150년 전이다. 지금은 많은 시민이 조깅과 피크닉을 즐기는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자동차 매연 없는 도심 광장


2018년 말 보수를 마친 마드리드 촤대 번화가 '그란 비아'. 차로를 왕복 4차선으로 줄이고, 보행로를 최대 3.4m로 넓혀 걷기 편한 환경을 만들었다. 사진 마드리드관광청
호텔에서 레티로 공원이 가까워서 10월 17일 해 뜰 무렵 조깅을 했다. 전 국민 달리기 부흥회라도 하는 걸까. 일찌감치 공원을 뛰는 사람이 많았다. 2만 종에 달하는 나무가 우거져서인지 숨을 들이켤 때마다 맑고 건강한 기운이 폐부까지 스몄다.
2년여 공사 기간을 거쳐 지난해 11월 재개장한 스페인 광장. 도심 한복판에 만든 녹지 공원이다. 사진 마드리드관광청
이틀 뒤에는 뉴욕 센트럴파크의 다섯 배 크기(17.23㎢)라는 '카사 데 캄포' 공원을 가봤다. 공유 자전거를 타고 갔다. 2018년 말 차로를 왕복 4차선으로 줄이고 보행로를 넓힌 '그란 비아' 거리를 지나자 '스페인 광장'이 나왔다. 돈키호테 동상이 있는 광장은 지난해 11월, 2년여의 보수를 거쳐 재개장했다. 광장에는 큼직한 나무를 많이 심어 공원화했고, 자동차는 지하 도로로 다니도록 했다. 도심 공기오염을 줄이고 시민에게 쉼터를 내주는 취지였다.

왕궁을 지나 만사나레스 강을 건너니 아담한 '리오 공원'이 나왔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10월 27일 이곳을 찾았다. 오 시장은 공원과 지하 고속도로를 둘러본 뒤 서울 강변북로 재개발 로드맵을 밝히기도 했다.

뉴욕 센트럴파크의 다섯 배 크기인 '카사 데 캄포' 공원. 언덕에 오르면 왕궁과 대성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최승표 기자

리오공원에서 달리기 시작해 카사 데 캄포로 진입했다. '마드리드의 허파'로 불리는 큰 공원이어서 작은 연못 주변만 뛰었다. 역시 달리는 시민이 많았다. 작은 언덕에 올랐더니 시내 쪽으로 전망이 탁 트였다. 왕궁과 알무데나 성모 대성당이 한눈에 들어왔고 그 위로 해가 쏟아졌다.

태양의 나라에 왔으니 멋진 해넘이도 봐야 할 테다. 카사 데 캄포 지척에 있는 '데보드 신전'이 일몰 명소다. 1960년대 이집트 아스완 댐 범람 때 도움을 준 스페인에 이집트 정부가 선물한 신전이다. 오후 7시 반, 하늘이 불타올랐다. 마드리드는 해발 600~700m에 자리한 도시다. 지대가 낮은 서쪽 평원으로 해가 떨어져서일까. 붉은 하늘이 유난히 광대해 보였다.

마드리드(스페인)=최승표 기자 sp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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