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의 세사필담] 젊은이의 양지
핼러윈이 대체 뭐라고? 아침에 들이닥친 비보(悲報)를 누가 곧이 믿었을까. 수많은 젊은이가 죽거나 다쳤다는 급보, 그것도 좁은 골목에서 압사했다는 소식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현실이었다. 폭 3m, 길이 50여m의 좁은 회랑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폭탄이 터진 것도, 건물 붕괴도 아닌데 300여 명의 젊은이가 죽거나 다쳤다. 가슴속 응어리를 터트리고 싶었던 청년들이었다. 무겁고 엄혹한 현실에 가위눌린 세대원들과 거리를 쏘다니며 청춘 찬가를 부르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죽음이었다니. 와류로 변한 인파가 흘러든 골목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핼러윈이 대체 뭐라고. 추석처럼 우리의 명절도 아닌데? 기성세대는 낯설기 짝이 없다. 핼러윈에 젊은이가 거리로 뛰쳐나온 까닭이 말이다. 잡신과 마녀 가면을 쓰고 활보하는 청년들의 세계관을 이해할 수 없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핼러윈 축제를 처음 접한 것은 아득한 유학 시절이었다. 추수감사절 막바지, 호박을 파서 만든 등불을 현관에 놓고 정원에는 해괴망측한 유령들을 매달아 동네 분위기가 한층 괴괴했다. 악령을 쫓는 행사라고 했다. 핼러윈을 전파한 아일랜드계 이주민이 가장 많은 보스턴 지역 축제는 극성맞을 정도다. 그럼에도 공감이 일지 않았다. 드라큐라 같은 서양의 악귀가 너무 낯설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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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명절도 아닌 핼러윈 축제
청춘 옥죄는 사회·경제적 악령을
내쫓는 주체적 퇴마사 되고 싶어
애도로 부족한 비극 눈물지을 뿐
」
그런데 왜 핼러윈인가? 한국 젊은이들의 시야엔 이미 세계가 들어와 있다. 한국적 풍습은 물론 세계 문물에 이미 익숙해졌다. 국가와 문명 경계가 사라졌다. 내가 즐기는 것은 그냥 좋은 것이다. 인터넷과 유튜브, 스마트폰 덕분일 텐데, 기성세대는 결코 물들 수 없는 K-팝에 이쪽저쪽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인터넷 시대 세계의 청년들은 소통의 광장을 이미 갖고 있다. 전통에 깊이 삭은 기성세대는 이해할 수 없다. 서양의 악귀는 동양의 사악한 귀신과 친척이다. 한국의 도깨비와 서양의 드라큐라도 일가(一家)다. 족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직접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축제의 주체라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악귀를 쫓을 때 무당을 부른다. 무당이 집전하는 미친굿, 두린굿에 동민들은 간절히 빈다. 무속인처럼 접신 전문가가 따로 있는데 가족들이 그저 손 모아 비는 전통은 지금껏 변하지 않았다. 구경꾼일 뿐이다. 예전 서양 기독교에도 목사가 직접 축사(逐邪)를 했고, 카톨릭은 사제가 구마(驅魔)를 담당했다. 그러나 공적 퇴마의식은 교회와 성당에서 사라졌다. 악령마저 하느님의 품 안에서 구원받기를 함께 갈구하는 예배 의식으로 진화했다. 신도의 주체화다.
핼러윈 축제에는 사제가 없다. 참여자가 직접 귀신을 쫓는다. 악귀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나보내는 의식에서 스스로 퇴마사가 된다. 각종 분장과 가면을 동원한다. 이웃 친지들과 먹고 노는 동안 원혼들은 무섭게 분장한 얼굴을 피해 떠난다. 설과 추석 제사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엄격한 제례를 따라야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주체의 향연, 그것도 사회적 운명을 함께 헤쳐나가는 세대원들과 나누는 공감, 연대, 위로의 행진에 왜 참여를 마다하겠는가? 10만 인파가 한국의 대표적 외국인 거리 이태원에 스스로 운집하는 현상을 그렇게 이해한다. 꽉 막힌 영토에서 짓눌린 나날들을 잠시 잊고 ‘주체적 악령’이 되고 싶은 거다.
한국의 청년들은 젊은 시간을 옥죄는 사회적, 경제적 악령에서 해방되고 싶다. 차단된 통로에서 벗어나고 싶다. 부모의 시간은 가난했어도 희망은 있었다. 대하드라마 ‘젊은이의 양지’가 방영된 것은 1995년이었다. 광산촌 청년의 꿈과 야망, 대기업 딸과의 사랑과 배신이 교차하는 순애보는 신분 상승과 부자 등극의 기회가 널려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 기회를 마다하고 주체적으로 낙향하는 주인공의 스토리에 감동했다. 전후 미국,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 영화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 제임스 딘 주연 ‘자이언트’(Giant) 역시 비슷하다. 상승과 하락의 기회를 스스로 결단하고 선택하는 시간이 젊은이들의 꿈인데, 막혔다. 주식과 코인으로도 뚫을 수 없다. 간신히 대기업에 취업한들 자기 인생과 거리가 멀다.
이 시대 ‘젊은이의 양지’는 어디인가? 대학 졸업장을 따고도 비정규직을 떠돌아야 하는가? 왜 열패감을 몰래 갈무리해야 하는가? 왜 사랑하는 사람과 빈손으로 결혼을 감행하지 못하게 만들었는가? 나 자신의 인생사이클을 왜 주체적으로 기획하지 못하는가? 1인 당 국민소득 3만5000달러 시대에 왜 청년들의 꿈은 이토록 궁핍해야 하는가? 보수든 진보든 정치권의 청년 정책은 왜 어김없이 처절한 결과만 안겨 주는가?
젊은이의 양지는 핼러윈 축제가 열리는 이태원에 있었다. 청춘의 크레바스를 뛰어넘고 꿈을 짓밟는 악귀를 저주하러 스스로 모였다. 클럽과 카페, 음식의 거리를 누볐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 골목길에서 그런 참사가 기다릴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애도만으로는 어림없는 비극에 기성세대로서 할 말을 잃는다. 꽃다운 생명을 눈물로 보낸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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