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향자 특별기고] ‘반도체 특위’ 만들어 대체 불가한 반도체 기술 확보해야
세계 반도체 패권 전쟁 속 한국의 길
미국이 반도체 전쟁을 시작했으니 모든 정책적 수단을 총동원해 자국의 반도체 산업을 키우고 동시에 중국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가리라는 것은 이미 예견됐다. 게다가 조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행정명령을 통해 미국 제조업 공급망 조사를 지시했다. 전임 도널드 트럼프 정부에서 시작된 미국 반도체 산업재건 계획을 더 강하게 이어갈 것이라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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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뿐 아니라 일본·대만·EU는 반도체 산업에 대대적 집중 투자중
한국, 미·중 패권 다툼 보면서도 ‘반도체 경쟁력 강화법’ 국회서 낮잠
반도체 투자에 세제 지원 방안 다룰 기획재정위 소위조차 구성 못 해
기술 인력, 정부 지원 등 경쟁국 수준만큼 시급히 여건을 마련해야
」
지난 3월 한국과 대만·일본을 향한 칩4(Chip 4) 동맹 결성 제안, 7월 반도체 시설 투자에 대한 보조금 지급 등을 핵심으로 하는 반도체 지원법 통과, 그리고 이달 들어 반도체 대중국 수출 규제 강화 등이 모두 그 일환이었다. 우리가 새로운 움직임에 대응할 틈도 없이 미국은 쉴 새 없이 자국 반도체 강화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어디 미국뿐인가. 일본·대만과 유럽연합(EU) 등은 반도체 산업 강화를 위해 한국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규모의 지원금을 투입하기 시작했고, 경쟁적으로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과연 반도체 산업 강화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 자문하면 안타깝게도 필자도 별로 할 말이 없어진다. 단적으로 실효성 있는 ‘반도체 지원법’을 만들어 보자고 시작했던 반도체특위의 결과물인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법’은 지난 8월 초 발의한 지 두 달이 넘도록 아직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투자에 대한 세제 지원을 다룰 기획재정위원회는 소위 구성조차 되지 않았다. 2023년 예산안에서 반도체 지원 예산은 상당 부분 삭감 내지는 반려됐다.
반도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고 국제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에 비해 한국의 상황 인식은 너무나도 한가로워 보인다. 어쩌면 정책 입안자들은 현재의 반도체 경쟁이 미국과 중국에 국한하는 싸움이어서 우리에겐 시급성이 낮다고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반도체 패권 잡느냐, 도태되느냐 갈림길
그러나 한국도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이번 대중국 수출 규제 강화조치만 놓고 보더라도 그렇다. 장비 수입을 1년간은 유예하겠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에는 중국에 반도체 공장을 운영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생산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간접적으로는 GPU의 대중 수출이 사실상 금지되면서 엔비디아와 AMD의 주문량도 감소할 수 있다.
글로벌 반도체 경쟁이 당장은 미·중 다툼으로 보이지만, 언젠가는 한·미 대결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1990년대까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았던 일본 반도체 산업의 경험을 보면 국가 간 산업·기술 경쟁에서 영원한 우방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1980~90년대 일본은 전 세계 D램 시장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글로벌 반도체 지형은 그야말로 ‘일본 천하’였다. 그러나 자국 반도체 기업들이 고전하자 미국은 1985년 플라자 합의와 1·2차 반도체 협정, 슈퍼 301조 등을 동원해 일본 반도체 산업을 압박했고 결국 일본 반도체는 쇠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1990년 반도체 매출 상위 10대 기업 중 1~3위를 차지한 NEC·도시바·히타치를 비롯해 6개 기업이 일본 기업이었다. 하지만 지금 10위 안에서 일본 기업을 찾아볼 수 없다. 그동안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신흥 강자로 부상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일본 반도체의 쇠락이 한국 반도체 산업 성장의 기회가 됐다는 사실보다도 미국은 반도체 산업에 있어서 언제나 철저히 자국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여온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반도체 전쟁에서 중국을 제압한 이후 궁극적으로 반도체 패권국이 되려는 미국의 다음 목표는 어느 나라일까.
미국 입장에서 반도체 기술에서 가장 큰 경쟁 상대는 한국과 대만이다. 7㎚까지 온 자국 기업 인텔이 한국과 대만의 3㎚ 수준까지 따라잡고 대대적인 정부 지원을 통해 미국 반도체 제조 공급망을 완비한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 반도체 산업에 우호적인 손길을 내밀 것인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다.
한국이 미·중 반도체 대결을 한 발짝 떨어져 관전하는 동안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강화는 속도를 내고 있다. 주로 일본과 대만·싱가포르 등에서 반도체를 생산해 온 미국 기업 마이크론에 보조금을 지급해 뉴욕주에 대규모 공장을 신설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미국 정부의 지원은 자국 기업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삼성전자가 텍사스주에 260조원을 투자한 배경에도 미국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이 있었다. 삼성전자가 한국이 아닌 미국에 천문학적인 투자로 반도체 공장을 신설하기로 한 것을 두고 한국 정치권은 뼈아프게 생각해야 마땅하다. 한국 기업이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강화에 일조하게 된 셈인데, 한국이 가진 최강의 무기인 반도체 주도권이 약화할 위험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로선 살점 하나 얻고 뼈를 통째로 내준 격일지도 모른다.
거시경제 상황마저 한국 기업에 불리하게 치닫고 있다. 연초에 달러당 1200원 선이던 환율은 1400원 선을 훌쩍 넘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원자재 가격 폭등이 시작됐는데 그에 더해 환율 변동만으로도 한국 기업의 원가 부담이 20%가량 더 높아졌다는 의미다. 과거 고환율 상황에서는 한국 기업에 가격 경쟁력이 생기는 구조였지만 지금은 수입 물가 부담이 너무 뛰어 그 공식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업계는 호소한다. 예전처럼 수출 대기업에 유리한 상황이 절대 아님을 정책 입안자들이 인식해야 할 때다. 그런데도 여전히 반도체 지원을 이야기하면 “대기업 특혜”라는 반대 논리가 거세진다. 관점의 변화가 필요하다.
반도체 경쟁은 국가 대표기업간 기술경쟁
반도체 산업은 기술과 자본 등 진입장벽이 높고 규모의 경제가 경쟁력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대기업만이 할 수 있는 사업이다. 경쟁국들도 글로벌 반도체 경쟁은 결국 각 국가를 대표하는 대기업 간의 기술·규모 경쟁이다. 탄탄한 대기업이 있어야 중견·중소기업 생태계가 형성되는 것을 알기에 반도체 대기업 지원에 적극적이다. 대만은 TSMC를 ‘호국신산’(護國神山·나라를 지키는 신령스러운 산)이라 부르며 국가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지금 한국의 반도체 산업이 처해 있는 상황은 2019년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사태 때보다 더 급박하다. 그 당시 청와대 중심의 상황 관리, 정부의 실효성 있는 대응, 정치권의 강경한 메시지 등 삼박자가 함께 이뤄졌다. 당시 필자는 ‘일본 경제 침략 대책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산업계와 기술계, 그리고 정부를 오가며 대책을 논의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생태계다.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와 같이 생산 차질 등 당장의 위협들이 눈앞에 보이지 않아 지금 마치 위기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큰 오산이다. 지금 우리는 미래 반도체 산업의 패권을 잡느냐, 도태되느냐 갈림길에 서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반도체 주도국으로 가는 길을 준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반도체 기술에 있어 대체 불가한 실력을 갖추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다. 우리 반도체 기술을 빼놓고서는 글로벌 첨단 산업 생태계를 논할 수 없는 위상에 오를 수 있도록 기술 인력과 정부 지원, 제도적 뒷받침 면에서 적어도 경쟁국 수준만큼은 시급히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정치·산업·학계 망라한 특위 만들자
이 모든 일을 해내기 위해 지난번 여당의 반도체 특위에 그치지 말고 정계와 산업계·학계를 망라하는 국가 차원의 ‘상설 반도체 특별위원회’ 설치를 제안한다. 산업계는 절박하게 느끼는 위기를 정치계는 인식조차 못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상설 특위에는 반도체 산업의 최일선에 있는 전문가 집단이 함께해야 한다.
이를 통해 시시각각 변화하는 반도체 경쟁 동향을 파악하고 산업계의 애로를 청취해 최적의 전략을 도출해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산업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실효성 있는 지원책을 실시간으로 논의하고 입안하는 시스템이 되려면 정치인이 아닌 산업 전문가가 특위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시간이 없다. 진정으로 반도체 산업을 살리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특위를 만들자.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미래 먹거리를 남겨줄 것인지 생각해 보면 답은 분명히 반도체다.
양향자 국회의원(무소속, 광주서을)·반도체산업경쟁력강화특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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