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은 '영국 힐스버러 참사' 교훈을 잊었나
[민주언론시민연합]
▲ 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 압사 참사가 발생한 골목길로 향하는 길이 경찰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
ⓒ 권우성 |
[기사 보강 : 4일 오후 2시 59분]
10월 29일 이태원 핼러윈 축제 현장에서 벌어진 참사로 온 사회가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언론은 유가족과 시민들이 사고의 충격을 견뎌낼 수 있도록 돕고, 다시는 이런 사고가 재발하지 않게 원인을 규명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도록 신중한 보도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건 초기 많은 정보가 뒤섞인 상황에서 언론의 신중하지 못한 보도는 또 다른 피해를 양산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단편적인 정보만 갖고 누군가를 특정해 사고의 원인을 찾는 듯한 보도는 시민들의 슬픔과 분노의 방향을 잘못 유도해 사건 피해자들이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거나 무고한 사람을 주범으로 몰아갈 수 있어 대단히 위험합니다.
MBC '약물' 주장 인터뷰이 방송 논란
MBC는 뉴스특보를 진행하는 도중 이번 사건에 대해 '단순 압사 사고가 아니라 약이 돌았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고 주장하는 시민 인터뷰를 그대로 내보내 논란이 됐습니다. MBC 앵커가 "현장 상황이 어떤지 보이는 그대로 전해달라"고 말하자, 전화 연결된 시민은 '처음에는 압사 사고라고 들었는데 단순 압사 사고가 아닌 것 같다. 이태원에서 약물이 돌았다는 말이 있는 것 같다'는 취지로 발언했습니다.
생방송 과정에서 이러한 '돌방성' 인터뷰가 생기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대형사고가 발생하면 혼란스러운 현장에서 목격자들은 다소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앵커의 대응입니다.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2014년 언론인들 스스로 제정한 재난보도준칙 13조와 14조는 '확인되지 않거나 불확인한 정보는 보도를 자제하고 불가피하게 단편적이고 단락적인 정보를 보도할 때는 부족하거나 더 확인돼야 할 사실이 무엇인지 함께 언급하여 독자나 시청자가 정보의 한계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뉴스 진행자는 목격자들의 정보가 부정확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정보의 한계를 시청자들이 인식하도록 해야 합니다. MBC 앵커도 "물론 추정입니다만" "조심스러운 추정" 등의 말을 덧붙였지만 "목격자님께서 보시기에 단순한 압사는 아니다. 많은 사람이 엉키면서 밟히면서 일어난 사고는 아니다"라며 발언을 다시 한번 정리하는 등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후 MBC는 '현장 상황을 예단할 수 없다'고 강조했고 마약이 돌았다는 주장과 관련해 경찰의 '사실이 아니라'는 발표도 전달했지만, 최초 속보의 파장을 고려했을 때 인터뷰 및 전달 과정에 조금 더 신중했더라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사건 시작으로 지목된 "내려가!" "밀어!" 영상... 원인 맞을까
'누가 먼저 밀었느냐'는 식의 소위 '범인'을 찾으려는 언론의 시도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장소에 인파가 몰려 벌어진 사고에 누가 밀기 시작했는지는 실제 사건의 원인에 중요하지 않을 뿐더러 그 사람들에게 대형 참사의 고의가 있었다고도 보기 어렵습니다. 언론이 관련 보도에 신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SBS는 10월 30일 오후 4시경 <"밀어" 고함 뒤 비명... 이태원 참사 목격자들 공통된 증언>(10/30)에서 "사고 전후 이태원 상황이 담긴 제보 영상"이라며 시민들이 "내려가!"를 연호하는 제보영상을 보도했습니다. SBS뿐 아니라 JTBC <"뒤로" 외쳤지만 순식간에... 사고 직후 혼돈의 순간들>(10/30), TV조선 <"당시 '밀어! 밀어!' 소리 들렸다"... 정확한 사고 원인 오리무중>(10/30), YTN <[자막뉴스] 손짓 몇 번에 움직이는 사람들?... 이태원 참사현장서 포착된 장면>(10/30) 등 현장에서 시민들이 외친 구호가 사건의 시작이라 짚은 보도가 다수 나왔습니다.
그러나 10월 31일 오전 새로 알려진 사실만 봐도 당시 시민들이 외친 구호가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그날 아침 동영상 공유 플랫폼 '틱톡'에는 사고 2~3시간 전 시민들이 똑같이 '내려가'를 외치면서 질서를 회복하고 막힌 길이 뚫리기 시작하는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현장에 제대로 된 통제가 있었는지가 문제의 핵심이지, 수백 명이 밀고 밀치는 상황에서 누가 먼저 밀었느냐를 찾는 것은 공허한 논쟁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 핼러윈 축제가 열리던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29일 밤 10시22분경 대규모 압사사고가 발생해 1백여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을 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참사가 발생한 좁은 골목길 바닥에 사람들의 소지품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
ⓒ 권우성 |
여기서 더 나아가 인터넷 상의 추측을 그대로 기사화해 '누가 범인인지'를 단정하는 듯한 보도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10월 30일부터 온라인상에는 이른바 '토끼 머리띠'를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게시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한국일보 <쏟아지는 "밀어, 밀어" 의혹... 온라인 동영상·목격담 잇따라>(10/30)을 시작으로 조선일보 <"5~6명이 밀기 시작" "토끼머리띠 남성" 잇단 증언... 경찰, CCTV 분석>(10/31), 중앙일보 <"다들 '뒤로' 외칠때, 맨뒤서 '밀어' 외쳐"... 경찰, CCTV 분석>(10/31), MBN <목격자 "토끼머리띠 남성이 밀라 했다"... 경찰, CCTV·현장 증언 분석>(10/31) 등 보도가 잇따랐습니다.
이러한 기사는 제목에서 '토끼머리띠 남성'이라는 키워드를 경찰의 CCTV조사와 나란히 배치해 마치 경찰이 어떤 남성을 범인으로 특정했다는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경찰은 CCTV를 '디지털증거 긴급분석' 대상으로 지정하고 조사하겠다고 했을 뿐 누군가를 범인으로 특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누군가 '밀어!'라고 외쳤다는 주장도 경찰에 따르면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이 엇갈리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일보는 <토끼머리띠 남성부터 BJ책임론까지... 추측성 '마녀사냥' 경계해야>(10/31)에서 검증되지 않은 무분별한 의혹 확산을 경계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1989년 영국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도 많은 인원이 경기장에 입장하면서 보호철망이 무너져 94명이 압사하고 766명이 부상당하는 대형 참사가 있었습니다. 그때도 경기장에서 전문적으로 난동을 벌이는 훌리건 5000여 명이 난입해 사고가 벌어졌다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경찰까지 그렇게 발표했으나 영국 정부는 독립적 위원회를 구성해 23년에 걸친 공식 조사 끝에 사고의 원인은 인원 통제를 잘못한 경찰에게 있다고 결론내리면서 사건 피해자들은 '훌리건 누명'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대형사고의 원인은 긴 시간 차분히 조사해야 원인을 밝힐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편적인 영상만으로 몇 가지 정황을 짜 맞춰 보도하다가는 잘못된 결론에 이르기 쉽다는 점을 언론은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 모니터 대상 : 2022년 10월 29~31일 13시 네이버 뉴스에 송고된 '이태원 압사 참사' 관련 기사
* 수정 사유 : 2022/11/1 17:15 수정 : MBC '약물' 주장 인터뷰이 발언 논란 관련, 앵커가 '확인되지 않은 인터뷰 내용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내용에 대해 MBC 측의 해명 내용을 반영해 서술을 보강·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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