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떨어진 재미 교포가 주인공, 불편하다는 점 인정"
[이선필 기자]
한 나라의 운명이 달린 중대한 일이 다른 나라 정치인들의 충동적 결정에 좌우된다면? 영화에나 있을 법하지만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국제 사회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남북 관계의 큰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2019년 하노이 회담이 끝내 결렬된 배경엔 미국 권력자 3인방이 있었다.
▲ 다큐멘터리 영화 <초선> 전후석 감독. |
ⓒ 디아스포라필름 |
너무도 다른 개성들
"첫 번째 작품 <헤로니모>(쿠바 혁명에 크게 기여한 임은조 선생의 다큐) 이후 제 행보를 고민하다가 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그 일이 일어난 방>)을 봤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유가 트럼프 전 대통령과 폼페이오 전 국무장관의 충동적 결정 때문이라는 대목에서 가설을 하나 세웠다. 만약 한인 정치인이 그들 곁에 있었다면 결과가 다르지 않았을까?
그와중에 (영화 주인공 격인) 데이비드 김을 비롯해 5명의 한인이 하원의원에 도전한다는 기사를 봤다. 일단 이례적인 일이니 그들을 다 촬영해놓자는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5명의 후보가 저마다 정말 다르더라. 세대, 인종, 정치적 지향성, 성적 취향 등이 모두 달랐다. 이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재미 한인 사회를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2020년 선거에선 무려 4명의 재미 한인 교포 하원의원이 탄생했다. 이중 미셸 박, 영 김, 그리고 메릴린 스트릭랜드(한국이름: 김순자)는 최초의 재미 한인 여성 하원의원이라는 역사를 썼다. 이 중 두 명이 공화당, 다른 두 명이 민주당 간판을 내걸었다는 것도 특이점이다. 하지만 영화는 선거에서 떨어진 데이비드 김 이야기를 중심으로 삼는다. 한국 교포의 성공기를 기대했던 관객 입장에선 당혹스러울 수 있지만, 전후석 감독은 "실제로 여러 관객이 아시안 아메리칸의 불굴의 도전기로 생각하고 보셨다가 오히려 보기 불편한 지점이 많았다고 토로하기도 했다"며 말을 이었다.
"물론 아시안 정치인의 탄생으로 정치력 신장이라는 대의에 관심 있지만, 표면적인 것보단 좀 더 복잡한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미국 한인 사회에 존재하는 복잡한 이슈와 갈등 구조를 마치 거울처럼 제시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우리 안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대의명분만 붙잡는 건 어불성설이라 생각했다.
서로 다른 배경, 가치관을 가진 한인들이 그 다름 속에서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질문하고 싶었다. 공존을 위해선 공통분모가 필요하잖나. 크게 두 가지로 봤다. 하난 4·29(1992년 LA 폭동을 일컫는 말)와 아시안 혐오 범죄, 그리고 다른 하난 고국을 떠난 이민자의 역사다. 영화 마지막 장면을 보면 아시안 혐오 금지법엔 네 후보가 뭉쳤지만, 대북 관련 종전선언에선 2대2로 갈라졌잖나. 어떤 답을 내리기보단,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재미 한인, 아시안이 공존해야 하는 이유를 함께 고민하게끔 묻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선거에 패배한 데이비드 김의 존재가 중요했다. LA 한인타운에서 풀뿌리 민주주의 실험을 시작한 그는 노동 변호사 출신이며, 스스로 게이임을 밝힌 성소수자기도 하다. 목사인 부친은 그 사실에 분노하며 현재까지도 아들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전후석 감독은 "다른 후보의 승리보단 데이비드 김의 패배를 통해 드러나는 게 더 분명했다"며 "세대 차이, 이념 차이, 종교와 성적 지향성 차이를 비롯해 온갖 사회적 갈등 구조가 그 한 사람을 두고 표출됐다"고 말했다.
▲ 다큐멘터리 영화 <초선> 전후석 감독. |
ⓒ 디아스포라필름 |
전후석 감독의 개인적 역사를 들여다보면 왜 그가 이런 주제에 관심을 두고 파고들었는지 더 분명히 이해된다. 1984년생인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냈다. 대입을 앞두고 한국 남성으로 자랄 것인지, 미국으로 건너가 새로운 도전을 할 것인지 결정하라는 아버지 말에 그는 후자를 택했다.
"열여덟 고딩이 시민권을 결정하는 그 무게감을 이해하긴 어려웠지.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봤는데 거기에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이 나오잖나. 그 대사의 영향도 있었고,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에 그리 호감이 있지 않던 차였기에 미국을 택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승준 사건'이 터졌다. 그걸 보며 속으로 '이제 난 한국에서 인정받는 한국인은 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국 대학에 가서 미국 사회에 젖어 들기 위해 더 노력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미국인이 된다는 게 뭔지를 잘 몰랐다. 백인화되면 되는 건지, 주류가 되면 되는 건지, 그렇다면 내가 가진 한국인의 정체성은 뭐가 되고 고국과 관계성은 어떻게 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차에 LA 폭동 역사를 알게 됐다. 대학에 강사로 오신 이경원 기자님 덕이었다. 그 사건 전엔 단순히 한국인 이민자였을 뿐인 사람들이 그 이후 재미 한인이 된 거라 하시더라. 즉, 이방인이 아닌 현지화가 되는 경험인데 그 자체로 엄청난 고통을 수반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재미 일본인들이 과거 2차 대전 때 수용소에 많이들 갇혔잖나. 그게 그들의 정체성을 만들었듯, LA 폭동이 한인들에겐 그런 경험인 셈이다."
전 감독은 "그 일 이후로 삶의 축이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변호사로 일하다 휴가차 쿠바에 들렀다가 택시에서 우연히 헤로니모의 존재를 알게 돼 <헤로니모>라는 영화를 만들게 됐듯, <초선>의 데이비드 김과의 만남도 어쩌면 그의 내면 깊이 자리한 정체성 관련 질문들이 서로 화학 작용한 결과 아닐까. 전후석 감독이 꾸준히 강조하는 개념이 있으니 바로 '디아스포라'다. 고국을 떠나 떠돌게 된 유대인의 오랜 역사를 지칭하는 이 개념은 이젠 이민자, 이주민들의 역사를 뜻하게 됐다.
근래에 각광받은 <미나리> <파칭코> 같은 작품의 등장은 그래서 상징적이었다. 전후석 감독은 "재미 한인들이 스스로 다원화된 정체성을 해석하고, 생명을 부여하는 것 같아 너무 좋았다"는 소회를 전했다. 그렇기에 이런 콘텐츠를 일명 'K 콘텐츠' 범주에 뭉뚱그려 포함하려는 일각의 시도엔 "대한민국 밖에 있는 여러 디아스포라의 존재와 그들의 이야기를 국가 차원으로 사유화하려는 것"이라며 비판적 시각을 내비치기도 했다.
"<미나리>, <파칭코>를 'K 콘텐츠'로 품는다는 건 재미 한인, 디아스포라의 주체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거다. 일종의 안티테제로만 생각하는 거지. 저도 물론 감히 결론을 낼 순 없지만 한반도 밖에 사는 모든 한인들은 (그곳에선) 소수자다. 모두가 이민자거나 이민자의 자녀기에 혼합적인 정체성이 있고, 다양성을 품는다. 전 그런 혼합성과 경계성 안에 다른 소수자를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는 환대적 정신이 내포됐다고 생각한다.
이방인적 사고가 다른 소수자를 인식하고 인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본인이 의식하든 못하던 간에 말이다. 이 지점부턴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디아스포라가 주체성이 되려면 그 정체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게 우리 삶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재미 한인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갈등들, 그리고 최근 들어 심해지고 있는 아시안 혐오 범죄 등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많다. 재미 한인들의 작품, 그리고 한국 감독과 문화예술인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혐오는 잦아들지 않는 현상에 전후석 감독은 "아이러니한 현상이라 이해해보려 노력 중"이라 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현상을 해석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 더 얘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자본도 투자가 되고 있다. 사실 아시안 콘텐츠가 돈이 되니까 자본이 들어오는 것도 있는데 개인적으론 전환기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저 스스로를 재미 한인으로 생각하려 했다면 이젠 범 아시안적인, 그러니까 아시안 아메리칸으로 인식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아시안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긴장감이 있고, 각각 다른 모국에 기반한 정체성이 다르지만 나름 공통의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아시안이 연대해야 하는 건 확실하다. 몇백 년간 이방인 취급을 받아온 아시안 아메리칸은 정치력을 키워야 할 수밖에 없다."
올 11월 다가온 연방 하원 의원 선거 결과는 어떨까. 2년 전 언더독으로 파란을 일으켰지만 낙선했던 데이비드 김 쪽 상황이 좋다고 전 감독이 귀띔했다. 선거 결과에 따라 극장 개봉 땐 데이비드 김의 웃는 모습이 쿠키 영상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고 한다.
영화 <초선>의 영어 제목은 'Chosen'이다. 초선의원의 초선이면서, 1882년 미국이 한국의 존재를 공식화한 문서에 적힌 조선을 뜻한다. 당시 미국 문서에선 조선을 'Chosen'라 표기했다고 한다. 동시에 '선택하다'(Choose)의 수동형인 '선택받다'(Chosen)를 뜻하기도 한다.
뜨거운 마음으로 만든 이 다큐멘터리가 한국 관객들에게 널리 선택받을 수 있길 감독 또한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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