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가 봐도 아니다 싶은 재판과 판결문
[김성호 기자]
어느 70대 여성을 만난 일이 있다. 아들이 군대에서 디스크 판정을 받은 뒤 그녀는 법정과 법률사무소, 지방보훈처와 병원 등지를 문턱이 닳도록 오가고 있었다. 군대에서 다쳤음에도 보훈청은 국가유공자 신청을 받아주지 않았다. 4년이 넘도록 소송을 벌인 끝에 마침내 승소했으나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고 했다.
어느 날인가, 그녀는 내게 한 법정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돈이 없어 1인 소송을 하던 그녀에게 판사가 수차례나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못했다고 했다. 뒤에 알아보니 재판은 녹음이 되지 않는 것이고 그런 말도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아서 어디에도 호소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비슷한 이야기가 적잖이 들려온다. 십여 년 전엔 판사가 성폭행 피해자의 강간 피해 전력과 노래방도우미 생활 등을 운운하여 피해자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판사가 방청객이나 피고인 등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거나 가르치는 듯한 발언을 하는 사례도 끊이지 않는다.
▲ 불량 판결문 책 표지 |
ⓒ 블랙피쉬 |
어떤 판사들의 민낯을 고발하다
판사는 공인이다. 사회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직업으로, 갈등의 최종 심판자가 되어 법에 따라 결정한다. 그 결정으로 누구는 인신의 자유를 빼앗기고, 누구는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지며, 누구는 억울함을 풀고, 누구는 빼앗긴 정의를 되찾는다.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직업이니 그에겐 얼마나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가.
그러나 모든 인간이 업에 걸맞는 인품을 지닌 건 아니다. 때로 좋은 인간조차 관행이란 이유로 저도 생각지 못한 잘못을 거듭할 때도 적잖다. 그리하여 하위 법관으로 표상되는 성의 없는 판결과 모욕적인 언사, 시민의 신뢰를 저버리는 재판이 이뤄지곤 하는 것이다.
여기 문제 많은 판사와 판결을 지적한 책이 있다. 최정규 변호사가 쓴 <불량 판결문>이다. 신안군 염전 노예 사건과 상급자의 괴롭힘으로 사망한 서울남부지검 김홍영 검사 사건, 풍등을 날렸다가 저유소 화재 책임을 뒤집어 쓴 외국인노동자 사건, 의도적 유령수술에 사기죄만 물어온 국가기관에게 책임을 묻는 국가배상소송 등을 대리해온 최 변호사가 직접 보거나 들은 불량 판사와 판결을 소개했다.
책은 재판시간은 당연하다는 듯 어기고 기일도 수시로 변경하는 법원의 태도부터 고압적 어조로 불친절하게 쓰이기 일쑤인 판결문 작성방식, 소송대리인이나 재판 당사자를 고압적으로 대하는 태도의 문제, 실제와 달리 생략되거나 왜곡되는 변론조서 등을 하나하나 지적해 나간다. 재판 당사자의 녹음도 허락하지 않는 문제나 국선변호인을 법원이 관리해 의뢰인보단 법원의 눈치를 보게 하는 제도적 미비점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는다.
세상은 하루가 빠르게 변해 가는데 법과 판례는 구태의연하게 제 자리만 지키는 대목도 신랄하게 비판하고, 피해자를 위로하기는커녕 화와 답답함만 돋운 재판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불친절한 사법부, 이래도 되는 걸까?
최근 우리 사무실에 어떤 분이 이런 판결문을 가지고 찾아왔다. 치과 진료를 받다가 의료 사고를 당했는데, 2년 넘게 소송을 했지만 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분이 화가 나는 건 판결문을 통해서는 소송에서 진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분이 가지고 온 판결문은 달랑 두 장이었다. 사건명, 원고, 피고 표시 등을 제외하면 사실상 딱 앞에 쓴 대로 여섯 줄이었다. 한마디로 '청구를 기각한다. 그러니 소송비용을 부담하라'가 끝인 판결문. - 96p
이런 판결문이 나올 수 있는 건 소액사건심판법 때문이다. 소송 금액이 3000만 원이 넘지 않는 사건은 이유를 기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규정 때문에 2400만 원대 소송을 건 이가 제가 진 이유를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유를 알 수 없으니 항소도 포기하고 억울함이 해소되지 않았다고 했다. 누군가에겐 큰 돈인 2400만 원이 소액이라는 이유로 판결내용조차 생략되는 것이다. 과연 합당한 일인가.
용감한 변호사의 법원 비판 교양서적
<불량 판결문>은 부당함에 맞서 싸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변호사의 눈에 비친 부적절한 법조풍경들이 가득 담겨 있다. 그 대부분이 일찍부터 알려져 온 것들이지만 개선의 노력은 부재하고 변화는 지지부진하여 그 자리서 그대로 반복되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지적하는 목소리가 더 많아져야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책에 실린 이야기 가운데 생동감 있게 전해지는 사례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시민들의 어려움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듯한 묘사가 얼마 되지 않고, 불량판결이며 불량재판, 불량판사에 대한 내용도 기대만큼 많지가 못해 아쉽다. 법원과 판결에 대한 대목만큼이나 법원 바깥 문제가 더 많이 묘사되고 있어 조금 더 내밀하고 밀도 있는 책을 기대했다면 아쉬움을 느낄 법도 하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책은 넓은 범위를 포괄하는 교양서적의 장점을 가졌다. 한 이야기를 깊이 파고드는 대신 다양한 주제로 문제와 개선점을 살피고 있어 이와 같은 문제를 잘 알지 못하는 이에게 영양가 있는 독서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무엇보다 책이 지적하는 문제 대부분이 여전히 한국 법정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이 여전한 생명력을 가졌다는 반증이다. 이 책의 쓰임이 어서 다하여서 구태의연한 무엇이 되기를 나는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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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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