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發 경제위기 2008 vs 2022
美中 갈등에 전쟁까지…방심은 금물
“언론에 나온 것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태로운 상황이다.”
최근 만난 대형 증권사 CEO는 자금 경색 국면을 이렇게 표현했다. ‘레고랜드’發 채무 불이행 사태가 자금 시장을 완전히 냉각시켰다. 일각에서는 “이러다가는 몇몇 건설사나 증권사는 위험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경고의 목소리를 낸다. 심지어 1998년 IMF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처럼 대형 위기로 확산하는 것 아니냐는 공포감이 터져 나온다.
자금줄이 얼어붙은 현장은 도처에서 확인된다.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이라는 둔촌주공 사업은 또다시 예상치 못한 악재를 만났다. 시공사로 참여한 4개 건설사와 증권사들은 10월 28일 만기가 돌아오는 사업비 대출 7000억원에 대해 ABCP 발행을 시도했지만 투자자를 구하지 못하다 12%에 겨우 차환 발행했다. 사업성이 보장된 서울 대단지 재건축 사업마저 PF 차환에 애를 먹고 있다는 점은 부동산 PF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대형 시공사가 수주한 서울의 몇몇 재개발 사업도 PF 자금 조달을 포기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떠돈다.
증권사도 불안하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증권사가 신용 보강한 만기 도래 PF ABCP 규모는 연말(10~12월)까지 27조1884억원, 내년 상반기(1~6월)까지 55조2836억원 등 총 82조4730억원에 달한다. 만에 하나 부동산 시장 냉각이 길어져 차환 발행에 실패할 경우, 신용 보강했던 증권사 채무도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다. 최근 대형사인 한국투자증권은 투자자들의 차환 거부로 지난 10월 19일 만기가 도래한 400억원 규모의 ABCP를 전액 매입했다. 공모주를 노리는 하이일드 채권은 매니저들 사이에서 ‘폭망’이라는 자조적인 단어까지 나온다. 한 증권사 임원은 “중소형사뿐 아니라 대형 증권사도 자금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며 “산업 곳곳에서 유동성 문제로 파산하는 흑자도산이 나타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채권 시장 ‘돈맥경화’는 통화승수로도 알 수 있다. 한은이 공급한 돈이 시중에 얼마나 잘 유통되는지 보여주는 ‘통화승수’는 8월 기준 14배로 전월(13.6배)에 사상 최저치를 찍은 뒤 여전히 부진한 수준이 이어졌다. 통화승수란 광의통화(M2)를 본원통화로 나눈 값이다. 통화승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국면을 전후해 26배까지 치솟았지만 이후 지속적인 하향세다.
고금리에도 시중에 풀리는 돈은 여전히 많다. 8월 기준 M2는 3744조1010억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2020년 4월 처음으로 3000조원을 돌파한 뒤 연일 몸집을 키워가고 있다. M2는 현금·요구불 예금에 2년 미만 정기 예·적금 등에 들어 있는 돈을 합친 것으로 언제든지 현금화 가능한 유동성을 뜻한다.
풀린 유동성에도 돈이 돌지 않게 된 주요 이유는 경기 침체다. 고물가와 공급망 교란 등 대내외 악재로 한국 경제가 흔들리는 양상을 보이자 국민이 지갑을 닫고, 기업이 투자에 나서지 않고 있다.
‘서민 자금줄’인 제3금융권도 빗장을 걸었다. 작은 대부 업체들은 신규 대출을 사실상 중단했고, 업계 2위 리드코프를 비롯한 대형 업체들마저 신규 대출을 속속 축소하고 나섰다. 은행과 저축은행을 비롯한 1·2금융권이 줄줄이 대출 문턱을 높이고 있는 가운데, 대부 업체들이 대출을 조이며 가계부채 뇌관이 터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저축은행·상호금융사 상황도 비슷하다. 저축은행중앙회에 따르면 9월 가계대출 중 아파트·주택담보대출을 취급한 저축은행은 총 24곳으로 8월의 30곳과 비교하면 20% 줄었다.
▶과거 위기와 뭐가 닮았나
▷급격한 금리 인상 후폭풍
경제통인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현재 위기가 IMF와 같은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금융과 실물경제 상황이 정말 심각하다”며 “옥석을 가려 기업과 금융 도산 사태가 임박할 때 누구를 살릴지 기준과 수단을 미리 강구해둬야 한다”고 했다. 산업조직론을 전공한 경제학자인 유 전 의원은 외환위기 당시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원이었다. 유 전 의원은 소셜미디어에 “1997년 IMF 위기는 그해 1월 한보그룹 부도에서 시작했고, 한보 부도 당시에는 아무도 엄청난 위기가 곧 닥칠 것을 알지 못했다. ‘레고랜드 부도’가 촉발한 금융 불안의 끝이 어디일지 우리는 모른다”며 이같이 적었다.
일각에서는 현재 위기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본다. 가파른 금리 상승과 부동산 PF 관련 각종 부채 문제가 도화선이 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2000년대 중반, 미국 기준금리가 급격히 높아진 상황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가 발생하며 금융위기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준금리는 1년 2개월 사이 2.75%포인트 상승했다. 지난해 7월 0.25%였던 기준금리가 3%까지 높아졌다. 미국 기준금리 상승폭은 더욱 가파르다. 올해 3월 0.25%에서 0.5%로 올린 이후 7개월간 무려 3%포인트를 인상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미국이 2004년부터 2006년까지 2년간 금리를 4.25%포인트 인상했던 것보다 빠른 속도다. 전문가들은 내년 초 미국 기준금리가 5%에 육박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는다. 이 경우 국내 기준금리도 3% 후반대까지 오를 가능성이 있다.
또 한 가지 유사한 점은 레버리지 이슈가 위기의 도화선이 됐다는 사실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 미국 금융기관들은 신용도 낮은 고금리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기초자산으로 삼는 고위험 고수익 파생상품을 비싼 가격에 팔았다. 이에 따라 자금이 부동산으로 몰리며 가격이 급등했다. 이후 금리가 급격히 오르자 거품이 꺼지며 수많은 금융기관과 기업, 가계가 위기에 빠졌다. 최근 국내에서도 레고랜드發 부동산 PF 불안으로 금융권 부실 우려가 커졌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1980년대 이후 가장 급격히 금리 인상이 진행 중이며 이에 따라 채권 금리도 가파르게 올라 대출 환경도 악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부 환경은 더 불안
▷우크라 전쟁 최대 악재
2008년보다 더 불안한 요인도 있다. 외부 악재만 놓고 보면 당시보다 더 심하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가장 큰 변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전쟁이다. 이미 전쟁이 장기화하며 각종 공급망이 무너졌고 물가가 크게 치솟았다. 코로나19 사태로 각 정부가 유동성을 대거 푼 상황에서 공급마저 줄어들자 물가가 천정부지로 뛴 것. 미국이 기준금리를 계속 올리는 이유도 물가 안정 때문이다.
만약 전쟁이 길어져 유럽 경제가 급격히 침체된다면, 글로벌 위기가 한국으로 전이되는 건 시간문제다.
두 번째 변수는 중국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중국 경제의 빠른 성장이 위기 탈출에 큰 도움이 됐다. 지금은 중국이 위기를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1인 통치 체제가 본격화하며 벌써부터 중국 경제와 기업 성장에 독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글로벌 자본 시장에 확산하고 있다. 시 주석 3연임이 확정된 후, 중화권 증시가 모두 폭락한 게 방증이다. 미국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 65곳 시가총액도 하루 새 734억달러(약 105조4000억원)가 증발했다.
아울러 미국과 중국 갈등이 내년에 더 심각해진다면 글로벌 공급망은 또 한 번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미국이 내년 초 금리 인상을 중단한다 해도, 시중금리는 더 올라가고 부채 리스크를 심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미국과 중국의 정치·경제 갈등을 배제하더라도 중국 경제 저성장이 문제 될 수 있다. 중국이 내년에도 ‘제로 코로나’ 방역 정책을 완화하지 않거나, 시진핑이 내세운 ‘공동부유’ 기조가 강화된다면 저성장 국면이 이어질 것으로 관측된다. 한국 경제의 상당 부분을 중국에 의존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한국 경제가 중국發 리스크를 만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는 이유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중국 경제가 흔들리면 그 여파가 우리나라로 전이될 가능성이 크다”며 “이 같은 리스크가 이미 원화 환율에도 반영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중국발 리스크가 국내 자금 경색 심화를 좌우할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제위기 현실화 가능성
▷신용도·외환보유액 안정적
다만 전문가들은 2008년과 같은 경제위기가 초래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판단한다. 2008년 이후 위기에 버틸 수 있는 기초체력을 길렀기 때문이다. 레고랜드 디폴트 사태에 정부가 선제적 대응에 나선 만큼 당장 큰 위험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한 일부 경제지표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근접한 수준까지 악화됐으나, 대부분은 당시보다 안정적이라는 점이 긍정적이다.
정부 행보도 빨랐다. 레고랜드 사태가 발생한 직후인 지난 10월 23일 정부는 시장 안정을 위해 50조원 이상 유동성을 풀기로 결정했다. 회사채를 비롯해 단기 금융 시장의 불안 심리 확산을 막고 유동성 위축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이다. 프로그램은 채권 시장 안정펀드(채안펀드) 20조원,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 프로그램 16조원, 한국증권금융의 증권사 유동성 지원 3조원, 주택도시보증공사(HUG)·주택금융공사의 사업자 보증 지원 10조원 등으로 구성됐다. 이외 KDB산업은행을 비롯한 정책금융기관 회사채와 CP 매입 프로그램 한도를 기존 8조원에서 16조원으로 늘린다는 계획도 밝혔다. 증권금융과 주택도시보증공사를 활용해 최근 어려움을 겪는 증권사와 건설사에 대한 지원방안도 내놨다. 이뿐 아니라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업권별 PF 대출 현황을 파악해 시나리오별 비상대응 계획 마련에 착수한 상황이다.
각종 지표가 2008년보다 안정적이라는 점 역시 위기 가능성을 낮게 보는 이유다. 국가 신용도 위험 수준을 보여주는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지난 9월 말 61bp(0.61%)를 기록하며 연고점을 기록한 바 있다. 올해 초 20bp 수준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급격히 치솟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비교하면 크게 떨어진다. 당시 수치는 650bp로 현재보다 10배 이상 높았다.
대외 지급 결제와 위기 상황에 대응하며 국가 경제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외환보유액 지표도 비슷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9월 말 기준 외환보유액은 4167억7000만달러다. 4364억3000만달러를 보유한 8월 말보다 196억6000만달러 감소했다. 2008년 10월 이후 13년 11개월 만에 기록한 최대 감소폭이다. 다만 2008년 당시 274억2000만달러 감소폭을 기록한 것과 비교하면 매우 양호하다는 평가다.
외환 시장 변동성을 판가름할 수 있는 환율변동성지수 또한 마찬가지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7~9월 환율변동성지수는 72.1포인트로 장기 평균 수준인 50포인트를 크게 웃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 83.3포인트를 기록한 2008년보다는 크게 낮은 수치다. 이 밖에 외환시장압력지수(EMPI)와 경제성장률, 기준금리, 기업부도율 등도 평균보다는 높은 수준이지만, 2008년과 비교해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08년에는 대부분의 경제 수치가 극단적으로 나빴다. 현재 그 정도는 아니다. 향후 상황이 급격히 안 좋아져 위험 수준으로 빠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예외적인 상황으로 실제 발생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미국 기준금리의 가파른 인상으로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잡히면 통화 정책이 유연해질 것이다. 환율도 내년 고점을 찍고 안정화될 것으로 분석된다.” 박희찬 미래에셋증권 애널리스트의 설명이다.
[명순영 기자, 문지민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81호 (2022.10.26~2022.11.01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