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F ‘나비 효과’…잠 못 이루는 증권·건설
“금융 시장 도처에 지뢰가 매복돼 있는 것 같다.” (채권 시장 관계자)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 리스크가 수면 위로 부상하면서 금융 시장은 연일 살얼음판이다. PF 리스크는 단기채권 시장에서 발생한 이슈지만 파급력이 워낙 크다. 최근 금융 시장은 유동화를 비롯한 고도의 금융기법이 접목돼 서로 다른 자산 혹은 시장 간 연결성이 과거보다 매우 높아졌다. 금융 시장 위기 시나리오를 분석한다.
▶증권사 줄도산 현실성은
▷PF 단기채 차환 실패 부담
금융권에서 가장 우려하는 시나리오 중 하나는 증권사 줄도산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 그럼에도 예측 불가능한 변수 등을 고려한다면 불가능한 시나리오도 아니다.
부동산 PF가 증권사 줄도산 우려를 낳는 메커니즘은 이렇다.
부동산 PF는 개발 사업의 미래 가치를 평가해 돈이 오간다. 앞으로 개발 사업에서 예상되는 현금흐름을 예측해 이를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것이므로 지금처럼 단기 금리가 급등하고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는 리스크가 커진다. PF가 투입될 사업장에서 기대할 수 있는 현금흐름의 예측 가능성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합 등 시행사에 PF를 대출해준 금융기관에서 대출 만기를 연장해주지 않는다면 지급보증을 선 건설사가 대금을 지급해야 한다. 만약, 금융사들이 앞다퉈 대출 연장을 거부하고 원리금 회수에 속도를 낸다면 당장 가용현금이 부족한 중소 건설사부터 무너진다. 여러 사업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자금 압박이 닥치고 건설사가 대금을 지급하지 못하면 이 건설사는 디폴트에 빠지고 돈을 빌려줬던 금융사는 자본잠식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부동산 PF는 고도의 유동화 기법이 적용돼 ‘ABS(As
set Backed Securities)’로 금융 시스템 곳곳에 퍼져 있다는 점이다. 부동산 PF 대출에서 파생된 유동화증권 규모만 2014년 20조9000억원에서 올해 6월 39조8000억원으로 18조9000억원(90%) 증가했다. ABS는 우리말로는 ‘자산유동화증권’으로 풀이된다. 유동화는 곧 증권화를 뜻하며 ABS는 넓게 보면 채권의 ‘사촌’쯤 된다. 쉽게 말해, 개별 사업장 현금흐름을 기반으로 대출 채권 권리 관계를 구분해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투자하기 쉽게 증권화했다는 의미다. 위험에 가장 취약한 곳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면 도미노처럼 부실이 확산할 수 있다. 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될 것이라는 우려를 가볍게 볼 수 없는 배경이다.
특히 증권사는 PF 대출 외에도 초대형 개발 사업의 토지 계약금 대출을 비롯해 프로젝트파이낸싱 후순위 투자, PFV 출자 대여, 후순위 담보대출, 사업비 대출, 보통주 투자 등에 공격적으로 나서 금융 업종 중 리스크가 가장 높다는 진단이다.
사정이 이렇자 증권 업계의 PF 관련 리스크를 심상치 않게 보는 시각이 확산 중이다. 당장 만기가 임박한 PF 관련 단기채가 잔뜩 쌓여 있다. 한국예탁결제원과 나이스신용평가 등에 따르면 증권사가 매입 보장하거나 신용 보강을 한 PF ABCP와 자산담보부단기채(ABSTB) 중 11월 만기가 오는 자산유동화증권(ABCP, ABSTB) 규모는 약 10조7300억원이다. 12월에는 9조7600억원어치의 만기가 도래한다. 내년 1월에는 10조7600억원이 넘는 규모의 만기가 도래해 향후 6개월 중 규모가 가장 크다.
문제는 또 있다. 만기 때 투자자를 구하지 못하면 증권사들이 고스란히 차환 실패 물량을 떠안도록 매입 약정이 돼 있다는 점이다. 이런 채무보증은 증권사의 우발채무로 잡힌다. 우발채무는 당장 갚아야 할 부채가 아니므로 현재 장부에 반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채무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아 상황에 따라 재무 리스크로 돌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실제 만기가 돌아온 PF ABS 중 증권사가 부담을 떠안는 사례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투자증권은 최근 만기가 도래한 400억원 규모 PF ABCP를 전액 매입했다. 현대차증권은 신용 보강한 전단채 중 만기가 도래한 물량 일부가 차환이 안 돼 자체자금으로 막았다. 증권사들이 떠안는 차환 실패 물량이 늘어날수록 단기 자금 시장은 조달 금리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시장에서는 단기 유동성 경색을 우려한다. 증권사의 자기자본 대비 PF 익스포저(비중)는 그리 높지 않다. 진짜 문제는 현금성 자산 대비 채무보증(우발채무) 비중이다. 투자자를 찾지 못한 악성 PF ABS 단기채 가운데 채무보증을 이행하려면 증권사들은 현금을 마련해야 한다.
단기 신용 경색으로 채무보증 이행 물량이 차곡차곡 쌓이는 가운데 증권사 유동성이 고갈되는 것을 전문가들은 가장 우려한다. 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국내 24개 증권사의 현금성 자산 대비 채무보증 이행 비율은 약 17%로 추정된다. 이는 코로나 사태 당시 PF 채무보증의 평균 이행률 13%를 가정한 현금성 자산 대비 비율이다. 쉽게 말해, 이 수치가 13%보다 높다면 단기 유동성 위기를 겪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의미다. 미래에셋, NH투자, 삼성, 키움 등 주요 4개 증권사는 이 비율이 증권 업계 평균을 밑돌았다. 다만, 이 비율이 40%를 웃도는 증권사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백두산 한국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26개 증권사의 자기자본 대비 PF 익스포저는 39%로 높지 않은데, 이는 자본 적정성의 문제라기보다 유동성 문제라는 뜻”이라며 “단기 자금 시장 조달 어려움으로 현금성 자산을 웃도는 수준의 채무보증 이행이 필요해지면 보유 자산 매각에 따른 자산 매매평가 손실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H지수 급락으로 ELS ‘노크인’
▷달러 마진콜 → CP 매도 우려
최근 홍콩H지수(HSCEI) 급락으로 파생 상품인 주가연계증권(ELS)의 연쇄 손실 우려가 커지는 점도 단기 금융 시장의 복병이다. ELS 손실은 파생 시장에 국한하지 않고 CP 등 단기채 시장을 자극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될 수 있다.
ELS는 특정 종목(종목형)이나 코스피200 같은 지수(지수형)를 기초자산으로 삼는다. 통상 6개월마다 기초자산 주가를 평가해 가입 시점에 약속한 조건을 충족할 경우 약정 이자를 지급한다. 예를 들어, 가입 6개월 후 코스피200지수가 최초 기준가의 95%, 1년 뒤 90% 이상이면 이자와 함께 원금을 조기 상환하는 식이다. 이때 95%와 90% 등을 두고 금융 업계에서는 ‘배리어’라는 용어를 쓴다. 기초지수가 배리어, 즉 허들을 넘을 경우 이자를 지급하기로 금융사와 투자자가 서로 약속하는 것이다. 원금 손실 구간을 뜻하는 ‘노크인(Knock in)’은 보통 50%대다. 기초지수가 최초 기준가 대비 반 토막 나면 투자자들은 원금 손실 위험에 노출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올 들어 H지수는 40% 이상 하락하면서 원금 손실 발생 구간에 진입했거나 근접한 상품이 속출하고 있다. 관련 ELS 상품 대부분이 H지수 5000~6000 사이를 노크인 구간으로 설정했는데, 최근 5200선을 위협받으며 손실 우려가 현실화했다. 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현재 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한 ELS 발행 규모는 10조3036억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H지수 5500 이상에서 손실이 발생하는 상품 규모만 2조5111억원이다. 현재 H지수는 5200선을 등락하므로, 이런 ELS의 대부분은 원금 손실 우려에 노출됐다는 의미다. H지수가 추가로 하락해 5000선이 무너지면 손실 발생 규모는 5조7167억원으로 급증한다.
시진핑 주석 장기 집권이 확정된 이후 중화권 증시 변동성이 커지면서 증권 업계에서는 ‘마진콜(증거금 추가 납부 통지) 사태’ 재현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읽힌다. 증권사는 ELS를 발행하면서 주가 지수 하락을 헤지(리스크 제거)하는데 지수가 급락하면 증거금을 달러로 채워 넣어야 한다. 2020년 3월 글로벌 증시 급락 때 증권가에서 불거진 대규모 달러 마진콜 사태가 단적인 예다. 특히 ELS 마진콜은 파생 시장에 국한된 이슈가 아니라는 점에서 금융권에서는 긴장감이 감돈다. 달러 확보를 위해 보유 CP 등 단기채 투매 → 조달 금리 상승 → 실물 시장 급랭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금융권에서는 우려한다.
실제 2020년 달러 마진콜 사태 때 채권 시장에서는 대형 증권사마다 CP 매도 물량이 쏟아졌다. 일부 증권사는 1조원어치 달러를 채워 넣어야 할 정도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CP의 주 고객인 MMF(초단기 펀드)에서는 CP를 매입하지 않는 현상마저 나타난다.
다만 당시와는 상황이 살짝 다르다는 진단이다. 백두산 애널리스트는 “대규모 달러 마진콜 사태 이후 외화 조달 비상 계획 구축, 원화 유동성 비율 제도 내실화, 자체 헤지 내 외화유동자산 비율 확대, 헤지 자산 내 여전채 편입 한도 축소 등의 조치가 이뤄져 2020년 상반기와 같은 악성 이벤트가 재현될 가능성은 제한적”이라고 밝혔다.
▶최악의 경우는 ‘헤어컷 감염’
▷자산 동시다발 매각으로 가치 하락
최악의 시나리오는 자본력이 취약한 중소 건설사나 증권사가 자금 경색을 버티지 못하고 줄줄이 무너질 때다. 이 경우, 연쇄적인 채무 구조조정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속칭 ‘헤어컷 감염’이 일어나면 PF 관련 자산 선순위 투자자도 담보 가치 하락이 불가피하다.
헤어컷은 머리를 자른다는 의미로, 금융 업계에서는 부실 금융자산의 순자산가치를 현실화하는 것을 뜻한다. 디폴트 우려로 가치가 뚝 떨어진 주식이나 채권 가격을 현실화하는 것인데, 이때 적용되는 하락률을 헤어컷 비율이라 한다. ‘헤어컷 감염’은 자산 가격 헤어컷이 연쇄적인 ‘마진콜’로 이어지는 경우를 뜻한다. 가령, 액면가 100원짜리 발행 채권을 40% 헤어컷해 60원에 매각한다면 이를 보유한 금융사는 담보 부족으로 마진콜 압력에 시달린다. 금융사가 마진콜에 대응하려면 보유 자산을 시가보다 낮게 급히 팔아야 하고 이는 다시 자산 가치 하락과 마진콜을 유도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금융당국에 일일 동향을 전한 증권사 임원은 “CP 시장은 하루하루 급박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며 “단기 시장의 경우 조 단위 영업이익을 내는 기업조차 자금 롤오버가 쉽게 되지 않아 흑자부도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이 작금의 시장 분위기”라고 전했다.
한편, 단기채 시장의 위기감이 커지자 금융당국과 업계도 자구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지난 10월 27일 한국은행은 자금난이 심각한 증권사·증권금융 등에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통해 약 6조원의 유동성을 직접 공급하기로 했다. 증권사 등이 한은에 RP를 매각하고 자금을 받아 갈 때 맡기는 적격담보증권 종류도 기존 국채, 통안증권, 정부보증채뿐 아니라 은행채와 9개 공공기관 발행채권 등으로 늘어났다. 증권업계도 자구책 마련에 나선다. 미래에셋증권·메리츠증권·삼성증권·신한투자증권·키움증권·하나증권·한국투자증권·KB증권·NH투자증권 등 9개 대형 증권사는 업계 ABCP 물량을 자체적으로 소화할 실질적 방안을 찾기로 했다.
[배준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81호 (2022.10.26~2022.11.0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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