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터에서 죽고, 길에서 죽고... 대체 국가는 어디에 있었나
[충북인뉴스 김남균]
▲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31일 오전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 헌화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 |
ⓒ 대통령실 제공 |
이태원 압사 참사가 벌어지기 불과 한 달 전인 지난 9월 26일 오전 7시 45분. 대전광역시 유성구 용산동 소재 현대프리미엄아울렛 대전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소방대원 126명과 장비 40대가 투입돼 진화작업을 벌였다. 화재발생 6시간 6분만에 불을 끄는 데 성공했다. 불은 꺼졌지만 7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한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망자 중 현대프리미엄아울렛 정규직 노동자는 한 명도 없었다. 사망자는 물류업체, 전기업체, 청소업체 등 용역과 하청업체에 소속된 직원들이 전부였다.
망자의 사연도 기구했다. 전기시설 관리용역업체에 소속된 서른세살의 청년 A씨. 한 시간만 더 늦게 화재가 났더라면 그는 야간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퇴근해 꿀 같은 단잠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올 초 전기자격증을 취득하고 용역회사에 취업한 지 5개월만에 사고를 당했다.
환경미화원 B(64)씨. 어려운 집안 환경 탓에 중학교를 마치고 일을 해야 해야 했다. 원양어선까지 타면서 동생들을 대학에 보내는 등 악착스럽게 살았다. C(60)씨와 D(71)씨는 이곳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하도급업체 소속이다. 매장이 개장하기 전 새벽에 일을 끝내야 했다. E(56)씨의 경우 출근 시간이 일찍 출근하는 날과 늦게 출근하는 두 가지였다. 사고 당일 하필이면 일찍 출근하는 날이었다.
"국가차원에서 원인 밝히고 사고 재발 않도록 하겠다"
화재 사고 하루가 지난 9월 27일 윤석열 대통령 대전 현대 프리미엄 아울렛 화재 현장을 방문했다. 윤 대통령은 합동분향소에 헌화하고 소방본부로부터 사고 브리핑을 들었다. 브리핑을 듣던 윤 대통령은 "공사 현장도 아니고 아무 상황도 아닌데 사고가 발생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후 유가족을 만난 윤 대통령은 "국가적 차원에서 과학적 감식을 통해 원인을 밝히고 이와 같은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라며 "유가족들의 어려움을 알고 있고 보상 또한 빠르게 진행하겠다"고 했다. 이에 유가족은 "안에 있던 사람들이 빠져나올 수 없었다"며 "앞으로 이런 사고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경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원·한국전기안전공사·소방 당국 등으로 합동감식반이 구성됐고 조사가 시작됐다. 이와는 별도로 대전경찰청은 대전청 수사부장을 본부장, 형사과장과 유성경찰서장을 부본부장으로 하는 수사본부를 설치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사고 현장을 방문하고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검토를 지시했다. 대전지방고용노동청 광역중대재해관리과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조사관 2명을 현장으로 파견했다. 대전지방검찰청도 조석규 형사3부장을 팀장으로 공공수사부 검사 등 총 6명으로 된 수사지원팀을 설치했다.
정지선 현대백화점 그룹 회장은 사고 현장을 직접 찾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정 회장은 이번 화재 사고에 대해 통감한다면서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피해자 지원 등을 약속했다. 그러나 화재의 원인조차 제대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현대백화점 그룹 측이 유족들에게 찾아가 위로금 등을 명목으로 합의를 시도하던 정황이 언론을 통해 드러나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 윤석열 대통령이 27일 오후 7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대전 유성구 용산동 현대아울렛 화재 현장에 마련된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
ⓒ 대통령실 제공 |
대전 현대프리미엄아울렛 화재가 발생하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국가'가 나타났다. 사회적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와 정치권은 국가의 역할에 대한 약속을 한다.
그때도 그랬다. 윤 대통령은 "국가적 차원의 과학적 감식을 통한 원인규명",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재발장치 대책 마련"이라는 국가의 역할의 언급했다.
이렇게 강조된 국가의 역할은 현재 어느정도 진행됐을까?
대전경찰청은 화재가 발생한 지 한달이 지난 지난 27일 관계자 13명을 입건했다고 밝혔다. 입건된 이들은 현대아울렛 대전점 안전관리 담당자들과 방재·보안 시설 하청업체 관계자들이다. 지하의 안전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이들을 상대로 화재 당시 지하의 스프링클러 등 방재시설 작동 여부, 대피 유도등과 대피로 등 안전 시설에 문제가 없었는지 등을 중점적으로 조사하고 있다고 했다. 한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수사중'인 상황이다.
윤 대통령이 강조한 '국가적 차원의 과학적 감식을 통한 원인규명'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앞뒤 안맞는 말
"법이나 제도나 이윤이나 다 좋지만, 사업주나 노동자나 상대를 인간적으로 살피는 최소한의 배려는 서로 하면서 우리 사회가 굴러가야 하는 것 아닌가." (윤석열 대통령)
지난 20일 윤석열 대통령이 SPC그룹 계열사 SPL 평택 제빵공장 사망사고와 관련해 덧붙인 말이다. 노동계는 대통령의 이 말을 '중대재해처벌법' 무력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받아들이며 반발하고 나섰다.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중대재해처벌법 완화 입장을 밝힌 상태. 대통령의 말이 나오기 전인 지난 달 16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노동부에서 제출받은 '기획재정부가 보낸 중대재해법령 개정방안에 대한 노동부 입장' 문건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기재부는 종사자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위반해 중대산업재해를 발생시킨 경영책임자에 대한 처벌을 대폭 완화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노동부에 제안했다.
우선 종사자 안전·보건 확보의무를 이행하지 않아 중대재해가 발생한 경영책임자를 1년 이상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 현행법 처벌규정에 대해 기재부는 "고의 또는 반복적으로 의무를 위반하는 경우에만 경영책임자를 처벌"하거나 "형사처벌 규정을 삭제"하자고 했다. 형사처벌 대신 "경제벌로 전환"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놨다.
중대재해처벌법은 노동현장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망사고에 대한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의 결과물이다. 법으로 정해진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비용의 문제로 치부해 마련하지 않는 기업, 그 기업 책임자에게 책임을 물어 안전장치를 마련하도록 하자는 것이 중대재해처벌법이 마련된 근거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7명이 사망한 현대프리미엄아울렛 화재사건과 관련 현대백화점 정지선 회장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소식은 현재까지 들리지 않는다. 현대백화점 고위 임원들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이야기도 없다.
시민단체 생명안전시민넷은 "정치권은 대형 사고가 발생할 때만 잠시 관심을 가질 뿐, 사람이 죽고 다치는 안전사고는 반복되고 구조적·근본적 원인에 대한 진단과 해법 모색은 부재하다"고 지적했다.
▲ 30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핼러윈 인파' 압사 사고 현장 골목 앞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꽃다발이 놓여 있다. |
ⓒ 연합뉴스 |
애도가 전부는 아니다
29일 발생한 이태원 압사 참사에 대한 정부와 대통령의 대처는 이전의 사고와 동일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고, 야당은 초당적 협력 입장을 밝혔다.
'조문과 애도'는 국가가 해야 할 역할 중 작은 부분일 뿐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 길거리에서 사망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진정한 책무다.
이태원 압사 참사에 대해 국가가 역할과 책임을 다했는지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또한 법 제정 등 제도적인 재발방지 대책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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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북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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