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기자, 이태원 증언 "1분 거리 10분 걸려…군중 통제 없었다"
"도로는 밀려드는 사람들로 더 이상 발 디딜 틈도 없었으나, 군중을 통제하는 인력을 본 기억은 없다."
한국에 10년 넘게 체류 중인 영국 출신 프리랜서 기자 라파엘 라시드는 지난 29일 밤 이태원 참사 당시 현장 상황을 이렇게 돌아봤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혼돈 그 자체(Chaos), 이태원에서의 핼러윈 밤이 어떻게 즐거움에서 공포로 바뀌었나'라는 제목으로 라시드가 작성한 기고를 30일(현지시간) 게재했다. 라시드는 참사가 일어난 날, 오후 7시쯤부터 이태원에 머물렀고 압사 사고 직후 현장을 직접 목격했다고 밝혔다. 라시드에 따르면 그날 오후 이태원 역 인근은 인파에 떠밀려 갈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으나, 참사 직전까지 관련 당국의 현장 통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코로나19 방역 완화 이후 해외에서 놀러온 지인들과 저녁 모임을 갖고자 이태원을 찾았다고 글에 밝혔다. "이태원역사 안 개찰구에서부터 역무원들이 밀려드는 인파를 관리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역사 밖 이태원 거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고 표현했다. 역에서 도보 1분 거리에 있는 모임 장소로 이동하는 데 10분 이상 걸릴 정도였다. 그는 "인파와 (통행을 방해하는) 핼러윈 메이크업 가판대 등을 뚫고 지나갔다"며 "사람들은 이미 정체된 도로로 쏟아지고 있었고, 대로에는 더 이상의 빈틈이 없었다"고 했다.
라시드가 2차 장소로 자리를 옮기기 위해 거리로 나온 시각은 오후 10시 30분쯤. 이때는 이미 호흡 곤란 신고가 접수되기 시작한 시각이다. 라시드는 들어올 때와 달리 인파로 꽉 막혀버린 거리에서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고 했다.
라시드는 이태원을 떠나기 위해 역사로 향했다. "저 멀리서 소방차·구급차 소리가 들렸다. 간신히 해밀턴 호텔 앞 이태원역 근처에 다다랐을 때 경찰 2명이 거리 통제를 하기 위해 경찰차 위에 올라서서 외치는 모습이 보였다." 당시 역 근처는 이태원으로 진입하려는 사람들과 빠져나가려는 사람들, 인근 클럽에서 흘러나온 큰 음악 소리가 겹치면서 '아비규환'이었다고 했다.
"'용산구 내 시민들에게 이태원에서 긴급사고가 발생했으니 귀가를 서둘러달라'는 서울시청의 긴급재난문자를 받았지만, 사태 파악이 바로 되지 않았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SNS)를 검색해봐도 아무 정보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는 "한국에서 긴급재난문자는 보통 자연재해나 긴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발송된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이후 이태원 길거리 한복판에서 심정지 환자들에게 심폐소생술(CPR) 등 응급조치를 하는 영상이 실시간으로 SNS에 올라오기 시작했고, 라시드도 곧이어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했다. 그는 "처음엔 당국이 '50명 심정지'라고 발표했는데, 한국에선 의료진으로부터 공식 사망 선고를 받기 전에 간접적으로 죽음을 암시하는 용어로 쓰인다"고 전했다.
라시드는 기고에 이태원의 지리·문화적 특성에 관해서도 소개했다. "이태원은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동서를 잇는 하나의 대로를 끼고 있다. 대로 주변으로 세계 각국의 술집과 클럽들이 즐비해 있고, 보행자들은 좁은 골목길을 통해서만 이동할 수 있다"면서다.
이어 "이태원은 과거 주한미군기지가 주둔해 있던 곳이며, 최근엔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 등 방역 정책으로 상권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지역 중 하나"라며 "한국내 보수적인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국에서 몇 안 되는 활기차고 생동감 넘치는 지역"이라고 덧붙였다.
김서원 기자 kim.seo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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