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동경했던 소년 문일민, 함일학교에 입학하다

김경준 2022. 10. 3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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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강 문일민 평전] (2) 출생과 성장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 <기자말>

[김경준 기자]

도산 안창호를 동경했던 10대 소년

문일민은 1894년 음력 12월 10일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咸從面) 함종리(咸從里)에서 부친 문명순(文銘純)과 모친 안명숙(安明淑) 사이의 2남 중 첫째로 태어났다.

7세에 서당에 입학해 전통적인 학문을 닦았던 그는 어릴 적부터 굳은 의지와 용감한 기풍을 나타내는 등 떡잎부터 남달랐다 전해진다. 문일민의 이러한 기질은 그가 태어난 평안도 지방 사람들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을성 싶다.

조선시대에는 평안도 사람들을 가리켜 '맹호출림(猛虎出林)'이라고 비유했을 정도로 평안도 사람들의 성격은 억세고 용맹했던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평안도 사람들의 주먹은 흉기"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평양 지역에는 '날파람'이라는 무술도 있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문일민이 태어난 강서군은 안창호·손정도·양기탁·조만식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한 고장이었다. 물론 단순히 강서군에서 여러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는 사실만으로 문일민 역시 독립운동가가 될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하는 것은 억지스럽다.

다만 그가 강서군에서 나고 자라면서 '고향 선배'들의 발자취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특히 안창호는 10대 시절 문일민의 민족의식 형성에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문일민은 "나는 14~15세 때부터 선생을 뵈오려 했고 선생의 가르치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였었으나 국내에서는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였으며 중국 상하이에서 그 영광의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라며 안창호에 대해 회고한 바 있다.

10대 시절의 문일민은 이미 안창호의 존재와 활동을 알고 있었다. 이는 문일민과 안창호가 같은 평안도 출신이기에 자라면서 그의 이름과 활동을 어떤 경로로든 접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실제로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활동 소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 내지는 조국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도산 안창호
ⓒ 위키백과
 

북간도 독립군 지도자들 배출한 '함일학교' 다녀

문일민은 서당 교육을 받았지만, 구시대적 전통 사상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13세가 되던 해, 근대식 사립학교인 함일학교(咸一學校)에 입학한 것이다.

함일학교는 1900년 이운협이 함경북도 경성(鏡城)에 설립한 유지의숙(有志義塾)의 후신으로 국어·한문·일본어·역사·지리·수학·박물·물리·화학·음악·체조 등을 지도하는 3년제 신식 학교였다.
 
 1907년 02월 22일 황성신문에 실린 <함일학교 취지>. 기존의 유지의숙(有志義塾)이란 이름을 함일학교(咸一學校)로 바꾼다는 사실과 함께 장차 나라에 쓰일 인재를 양성하겠노라는 포부를 담고 있다.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문일민의 함일학교 입학은 그가 독립운동가로 성장하는데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함일학교는 단순히 신식 학문만을 지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며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함일학교 출신들 중에는 훗날 우리 독립운동사에 크나큰 발자취를 남긴 이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교장이었던 김영학(金永學)은 1920년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외교부장으로 활약했고, 북간도 지역 무장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서일(徐一)·안무(安武)·현천묵(玄天默) 등도 모두 함일학교 출신이었다.

문일민은 16세가 되는 1909년까지 함일학교에서 수학한 것으로 이력서에 기술한 바 있는데, 이처럼 민족 교육을 실시한 함일학교를 다니며 소년 문일민은 차츰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품기 시작했던 게 아닐까.

다만 함일학교는 함북에 있던 학교로, 평안도 지방에 거주하던 문일민이 어린 나이에 연고도 없는 함경도까지 건너가서 수학했다는 사실은 다소 의문이 남는 부분이다. 문일민의 함일학교 수학 여부에 대해서는 함일학교 재학생 명부 등 추가적인 사료 발굴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망했다. 그러나 소년 문일민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당장 생계를 이어가는 일이 더 급했다.

문일민은 평양 일대에서 잡화상·물산 위탁판매상으로 활동하며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갈증이 심했던 그는 하루 종일 장사를 하며 지친 몸을 이끌고 밤에는 야학 활동을 병행하는 등 그야말로 주경야독을 실천했다.

그렇게 세월은 속절 없이 흘러가고 마침내 1919년이 밝았다. 문일민의 나이 스물 여섯이었다.

- 3부에서 계속 -

[참고문헌] 

1)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 대한민국공훈사발간위원회, 1991.
2) 김형목, 「함경북도 鏡城의 私立咸一學校維持契」, 『한국독립운동사연구』5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6.
3) 도산안창호선생전집편찬위원회, 『島山安昌浩全集』13,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
4) 이동언, 「만주 독립군지도자를 길러낸 함일학교」, 『월간 독립기념관』 287호, 2012.
5) 흥사단,「제239단우 文逸民」, 19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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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연재는 글쓴이의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의 생애와 민족운동>(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22)을 평전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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