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 트렌드 취재 | 다시 날갯짓 시작한 한국 e스포츠의 ‘산실(産室)’
게임전문채널 OGN(前 온게임넷) 리부트, 마니아들 가슴 설렌다
2030 학창 시절 스타크래프트·롤 리그 잇단 흥행… 게임사와 중계권 다툼 후 채널 몰락
OP.GG 인수 및 정비 후 재출범 예정, 저작권 없는 리그 중계보다 자체 콘텐트 주력할 듯
"스타크래프트는 예술이었고, 문화였으며, 우리의 학창 시절이었다.” 2030세대는 물론 40대까지 스타크래프트리그(이하 스타리그)에 미쳐 있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온게임넷(채널 ‘OGN’ 전신)이라는 케이블 채널을 통해서다. 그 시절 e스포츠 선수들은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는 선망의 대상이자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땀내 나는 열정과 경기에 패하면 분해서 끝내 눈물을 보이는 투쟁심, 끈끈한 동료애를 보여주는 선수들의 모습은 또래 청년들을 매료시키기 충분했다. 온게임넷과 함께 등장한 e스포츠 시장엔 SKT·KT·삼성·CJ 등 대기업들이 투자해 프로리그 선수단을 운영하는 시스템도 갖췄다.
각본 없는 드라마를 연기하는 것은 선수들이지만, 스포츠를 극적으로 만드는 스토리는 경기장 바깥에서 만들어졌다.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도 빠져들도록 이끄는 해설진의 스토리텔링은 선수들과 팀에 아이덴티티를 부여했고, 그로 인해 팬덤이 형성되기도 했다. K리그 ‘서울-수원 더비’에 견주는 프로리그 숙명의 라이벌 SK-KT 통신사 더비, ‘테란의 황제’ 임요환과 ‘폭풍저그’ 홍진호의 대결인 ‘임진록’ 등 숱한 이슈를 양산했다.
세계 최초 게임전문채널 온게임넷은 이 모든 것의 요람이라 할 수 있다. 온게임넷은 스타크래프트 경기를 중계하며 10대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케이블 TV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석권했다. 2010년에는 대한항공이 리그 공식 후원사로 등장하며 시장 잠재력 또한 입증했다. 비행기 격납고에서 개최된 대한항공 스타리그 결승전에는 조현민(현 ㈜한진 사장) 당시 대한항공 IMC 팀장이 시상자로 등장해 화제가 됐다. 그렇게 성장을 거듭하던 온게임넷이었지만 ‘게임사가 1차 저작권을 가진다’는 구조적 한계를 넘지 못했다. 게임사와의 알력이 불거지자 채널은 크게 휘청였다. 그렇게 영향력이 줄어들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던 게임전문채널 OGN(온게임넷 후신)은 2022년 새로운 후원자로 등장한 OP.GG의 후원을 업고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2030의 마음을 다시 한번 설레게 만들 ‘리부트’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스타리그’ 추억
넘치는 팬들의 사랑에 선수들은 쇼맨십으로 보답했다. 당시 10대 후반, 20대 초반이었던 어린 선수들은 압도적 실력과 스타성을 내뿜으며 시대를 풍미한 선수에게 붙는 칭호인 ‘본좌’ 라인을 형성했다. 2000년대 초반 임요환·이윤열·최연성·마재윤에 이르는 일명 ‘임이최마’ 라인에 이어 2010년대 김택용·송병구·이영호·이제동 ‘택뱅리쌍’ 라인이 있었다. 이들은 수차례 스타크래프트 개인리그 결승전에 올라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정상급 플레이어들이었다.
코치진 간의 도발과 신경전, 선수들 간의 라이벌 관계 형성은 게임의 맛을 돋우는 양념 같은 것이었다. 팬들은 임요환과 ‘폭풍저그’ 홍진호의 만남을 임진록이라고 부르며 수많은 서사를 쏟아냈다. 이때 임요환에 밀려 2인자 이미지가 굳혀진 홍진호는 전문 방송인이 된 후에도 숫자 2와 연관된 밈(meme)으로 방송에 출연하고 있다.
이야기는 특정 선수들 사이에서만 국한되지 않았다. 떠오르는 신예가 첫 본선 진출 만에 우승까지 거머쥔 ‘로얄 로드’, 가을 시즌 리그에서는 프로토스가 반드시 우승한다는 ‘가을의 전설’ 등 리그 자체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를 만들어내는 중계진에 대한 팬들의 애정까지 더한다면, 그 시절 스타리그는 부가적인 콘텐트가 쏟아져 나오는 화수분이었다.
하지만 산이 높을수록 골도 깊었다. 프로리그 우승을 휩쓸던 SKT와 KT의 통신사 더비는 언제나 만석에 경기장 바깥까지 사람들이 서서 관람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만, 비인기권 선수단과 2군 선수들은 몇백만원에도 연봉 계약하며 ‘열정페이’로 버티는 사례도 많았다. 2군 선수들은 게임단 숙소에서 하숙하며 잡일을 도맡아 했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을 ‘설거지’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은 어린 선수들이 온전히 게임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 이에 더해 스타크래프트의 게임사 블리자드(Blizzard)가 중계권을 주장하며 온게임넷의 대표 콘텐트였던 스타리그는 뿌리째 흔들렸다.
온게임넷이 외적으로 난항을 겪기 시작할 무렵 내부적인 문제도 불거졌다. 프로게임단 선수들의 승부조작 연루라는 대형 악재가 터진 것이다. 조작 선수 명단에는 마재윤 등 최정상급 선수도 포함돼 있어서 팬들의 실망감을 샀다. 그 여파로 선수들의 열정과 리그의 시장성을 보고 투자했던 대기업 후원도 끊어졌다. 당시 온게임넷 관계자는 리그 후원사를 구하는 기업 미팅 자리에서 “거기 뭐 조작 문제 있지 않았어요?”라는 핀잔을 노골적으로 들어야 했다.
블리자드와의 중계권 분쟁과 프로게임단 선수들의 승부조작 연루 사건 등으로 스타리그가 존폐 위기에 놓이자 온게임넷은 대체재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라이엇 게임즈(Riot games)의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롤)가 한국에 진출한다는 소식이었다.
스타리그 제작 경험으로 롤리그 안착시켰지만…
온게임넷은 곧바로 LCK(Lol Champions Korea)의 전신인 ‘롤 인비테이셔널’을 진행하며 본격적인 롤 중계의 막을 열었다. 압도적 기량과 개성을 뽐내는 선수들과 해설진, 그리고 리그를 완성시키는 스토리텔링이 더해져 온게임넷은 롤리그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다. 첫 대회였던 롤 인비테이셔널이 대성공을 거두자 채널 존폐 위기를 극복하는 걸 넘어 온게임넷은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열악한 인프라 속에서 관계자들의 열정으로 쌓아 올린 스타리그와는 달리, 롤리그는 갖춰진 시스템 속에서 출범했다. 드래프트로 선수를 발굴하고 리그를 키워나갈 수 있었다. 이후 온게임넷은 2015년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해 ‘OGN’으로 이름을 바꾼다.
하지만 중계권 분쟁의 암운은 롤리그에도 드리워졌다. 2016년 라이엇 게임즈가 ‘OGN의 독점 중계’를 지적하며 국내 롤리그 중계의 다원화를 시도했다. OGN과 SPOTV는 롤리그 중계권을 분할해야 했고, 곧이어 2019년부터는 라이엇 게임즈가 자체 중계를 시작하며 게임 중계권을 거둬갔다. 그동안 OGN이 이러한 사태를 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스타크래프트(블리자드), 롤(라이엇 게임즈), 오버워치(블리자드) 등의 콘텐트 중계권을 상실하자 채널의 인기는 급격하게 시들었다. 리그 중계가 아닌 자체 제작 콘텐트는 그 대체재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수많은 올드 팬이 떠나갔다. 수많은 e스포츠 관계자와 팬, 기업체에서 스타리그를 되살리겠다고 여러 차례 도전했지만 지속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현재 아프리카TV에서 주최하는 ASL(AfreecaTV StarLeague)을 비롯한 몇몇 리그만 아프리카TV 플랫폼 내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오리지널 콘텐트로 거듭나려는 OGN의 비전
이는 그간 OGN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던 리그 중계에서 힘을 빼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렇다면 앞으로 OGN에서는 스타리그를 비롯한 e스포츠 경기 중계를 볼 수 없는 것일까. 남 대표는 “중계를 아예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라며 “스타리그는 OGN의 정체성이자 시작이다. 따라서 리그 중계를 중심에 두지 않을 뿐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려 한다”고 답했다. 아프리카TV가 스타리그 콘텐트로 성과를 내는 상황에서, 그 시장을 파고들어 양분하지는 않겠다는 의미다. 대신 ASL과 차별화된 또 다른 스타크래프트 관련 콘텐트를 들고 나올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용자들은 익숙한 플랫폼과 추억의 채널이 협업한다는 사실에 기대감을 표출하고 있다. 10대 학창 시절을 온게임넷에 빠져 지냈던 백인태(28)씨는 “리그 중계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OGN의 또 다른 시그니처가 될 콘텐트가 무엇이 될지 기대되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스타크래프트 1세대 프로게이머의 팬인 채영혁(41)씨는 “OGN이 가진 과거 VOD 영상도 잘 활용한다면 그 또한 성공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OGN 내부에서는 10월 말부터 자체 콘텐트를 하나둘 선보일 계획이다. 남 대표는 “2023년 1월 1일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시청자들 앞에 선보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 이승훈 월간중앙 기자 lee.seungho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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