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기차·호텔·갑문…인천의 국내 최초 기록에 얽힌 안타까운 역사

성선해 2022. 10. 3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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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이나 물품을 국내외로 보내는 우편, 전국 팔도 방방곡곡을 연결하는 교통수단 기차, 휴식을 위해 찾는 호텔에는 공통점이 두 가지 있어요. 첫 번째, 이들은 개화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신문물이에요. 개화기란 1876년 조선과 일본이 맺은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분기점으로 우리나라가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아 근대적 사회로 나아가던 시기를 말해요. 두 번째 공통점은 인천을 통해 우리나라에 최초로 도입된 신문물이라는 점입니다.

박춘화(맨 왼쪽) 해설사가 소중 학생기자단에 개화기 인천의 모습과 이 시기 유입된 신물물에 관해 설명했다.


그런데 왜 외국 문물의 국내 도입지는 인천인 경우가 많을까요. 권도준·박시오 학생기자가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인천광역시 중구에 있는 인천개항박물관을 찾았어요. 1883년 개항 이후 개항기 모습과 관련 전시품이 모여있는 곳이죠. 인천 중구 역사문화해설사 박춘화 회장(이하 박 해설사)과 함께 전시실을 둘러보던 시오 학생기자가 "인천은 부산·함경남도 원산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개항된 도시라고 들었어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어요. "1876년(고종 13년) 2월 강화도에서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강화도 조약이 계기예요. 조약에 조선이 일본과 통상하기 위한 항구를 개항한다는 내용이 있었죠." 특히 인천은 조선의 수도인 한성과 가까운 항구였기 때문에 일본은 인천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어요.

1875년 일본은 자국 상품 판로를 개척하고, 조선 침략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어요. 일본 군함 운요호가 해안 측량을 핑계로 강화도 초지진에 불법 침입한 뒤 충돌이 벌어지자 그 책임을 조선에 전가한 거죠. 이를 빌미로 조선의 문호를 강제로 개방하는 조약,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일본의 조선 침탈 시발점이 된 강화도 조약을 맺었어요. 이후 조선이 미국·영국·일본·독일 등과도 통상을 시작하면서 인천에는 외국인 전용 주거 지역인 조계지가 생겨났죠. 세계 각지에서 신문물이 유입되기 좋은 환경이 형성된 겁니다. 당시 외국인들이 살던 조계지에서 일어난 일은 조선이 아닌, 각국의 법이 적용됐는데 이것을 치외법권(治外法權)이라 해요.

인천개항박물관이 있는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로에는 개항 후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외국인들이 서울로 가기 전 묵었던 조선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도 있다.


개화기 인천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온 주요 신문물을 차례대로 살펴볼까요. 첫 번째 주인공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입니다. "1888년 준공된 대불호텔에는 온돌이 아닌 침대방으로 꾸민 11개의 객실이 있었고 서양식 식사를 제공했어요. 당시 노동자의 일급이 23전 정도였는데, 대불호텔 상등실의 1박 가격은 2원 50전, 일반실은 2원 정도였어요. 지금으로 따지면 100만원이 넘는 거죠. 그래서 조선인보다는 외국인들이 주 고객이었어요."

1896년 창간된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도 인천 부근에 세워졌어요.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15.7km 떨어진 팔미도에서 입출항 선박들의 안전 운항을 위한 지표 역할을 수행했죠. 인천개항박물관 전시실에서는 팔미도 등대의 축소 모형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인천항이 있는 서해는 밀물과 썰물의 높이 차이가 심해서 만조가 아니면 배가 진입하기 힘들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무역선과 군함이 잘 드나들 수 있었나요?" 박 해설사의 설명을 듣던 도준 학생기자가 물었어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제강점기였던) 1918년 인천에 우리나라 최초로 갑문식 도크가 들어섰어요." 박 해설사가 이들을 갑문식 도크의 원리가 담긴 영상이 상영 중인 모니터 앞으로 이끌었죠.

밀물과 썰물의 높이 차이가 심한 인천항은 우리나라 최초의 갑문식 도크가 들어선 항구이기도 하다.


갑문식 도크란 항구 진입로에 여러 개의 갑문을 만들고, 배가 갑문에 들어오면 바닷물을 가둬 일정한 높이로 맞춰 다음 갑문으로 나갈 수 있게 만든 겁니다. 그러면 조석간만의 차가 심한 항만에서도 선박이 상시로 입출항할 수 있어요. "여기에는 가슴 아픈 뒷이야기도 있어요. 갑문식 도크를 만들기 위한 축항 공사에 참여한 인부 중에는 백범 김구 선생도 있었어요. 당시 선생은 무관학교 설립 자금을 모집하다 검거된 안명근 사건(안악사건)으로 1911년 징역 17년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었는데, 공사장에 죄수들이 동원되면서 김구 선생 역시 이곳에서 노역하셨죠."

1899년 개통된 우리나라 최초 철도를 달린 경인선 기관차 모형.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역시 인천과 관련이 깊어요. 1899년 개통된 인천~서울 노량진을 잇는 경인선이 바로 그 주인공이에요. 1889년 미국 주재 대리공사로 근무하다 귀국한 이하영을 통해 조선 정부는 사람과 화물을 대량 운송하는 철도의 중요성을 인지했죠. 철도 부설 추진 과정에서 기술도 자금도 부족해 1896년 미국인 모스에게 서울(한성)과 인천을 연결하는 경인선 부설권을 넘겼고, 모스가 자금 조달에 실패하면서 1899년 1월 철도 부설권은 일본 정부와 자본가들이 세운 경인철도합자회사로 넘어갔습니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같은 해 9월 18일 인천~서울 노량진을 잇는 33.2km의 철도, 경인선이 영업을 시작했어요. 도준·시오 학생기자가 전시실에 있는 경인선 기관차 모형을 살펴봤습니다.

당시 기차는 불을 뿜고 달린다고 해서 화륜거(火輪車)라고 불렸는데, 120여 년 전 조선인들의 눈에 기차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 같아서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에서 연기는 반공에 솟아올랐다. (중략) 수레 속에 앉아 영창을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도는 듯하고 나르는 새도 따르지 못하였는데, 80리 되는 인천을 순식간에 당도하였다."(독립신문 1899년 9월 19일자)

1910년대 사용된 전신기. 개화기는 조선인들이 접해보지 못했던 신문물들이 대거 국내로 유입된 시기다.


철도뿐만이 아닙니다. 인천은 서울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우편물을 접수하고 배달한 도시이기도 해요. 고종은 1883년 4월 우편 창설에 관한 칙령을 발표, 우정총국을 세우고 14명의 초기 우정국 직원들이 한성~인천 간 우편 업무를 시작했어요. 당시 우편물을 배달하던 우체사전부의 사진을 보던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박 해설사가 설명했죠. "한성과 인천의 우체사전부는 매일 오전 9시 서로의 우체사에서 우편물을 담은 우체낭을 짊어지고 동시에 출발했어요. 한성우체사와 인천우체사 중간지점이 지금의 서울 구로구 오류동인데, 각각 40리씩 걸어 중간지점에서 만나 서로의 우편물을 교환하고 오후 5시 30분까지 복귀했죠."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우편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 주사댁' '김 생원댁' 등 부정확한 주소를 적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초기 우체사전부들은 우편물을 정확히 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해요.

개화기 인천의 거리 풍경(위쪽 사진)과 경인선 기관차 사진. 당시 인천은 세계 각지에서 온 무역선과 상인들로 활기가 넘치던 국제적인 도시였다. 인천을 통해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과 신식 군함, 등대 등 신문물이 국내로 대거 유입됐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오가고, 무역하던 개화기 인천 조계지에는 외국에서 들어온 은행들도 여럿 있었어요. 현재 인천개항박물관이 위치한 거리도 일본 제1은행·제18은행·제58은행 인천지점이 모여있던 곳이죠. 인천개항박물관도 본래 조선에서 만들어낸 금괴와 사금을 싸게 살 목적으로 인천에 진출했던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 건물이었어요. 이곳에 지어진 은행들은 조선에 거주하던 외국인, 특히 일본인의 무역·상업활동을 지원·보호하기 위해 설립돼 조선 정부와 상의 없이 무단으로 지폐를 발행하는 등 조선의 상품과 노동력 침탈에 앞장섰어요. 이국적인 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이 즐비한 거리에는 이런 슬픈 역사가 얽혀있답니다.

박시오(왼쪽)·권도준 학생기자가 인천개항박물관을 찾아 1883년 개항 이후 개항기 모습과 근대문화를 살펴봤다.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로서 인천의 위상은 개화기로부터 100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여전해요. 한국과 전 세계를 연결하는 인천공항, 수도 서울의 관문인 동시에 서해안 최대의 무역항인 인천항만 봐도 알 수 있죠. 또한 강화도 조약으로부터 1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개화기의 흔적은 인천 외에도 우리나라 곳곳에 많이 남아있는데요. 소중 독자 여러분 주변에는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고, 그 뒤에 숨은 이야기도 찾아보세요. 흥미로운 뒷이야기는 물론, 우리나라 근대 역사까지 들여다볼 수 있답니다.

■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 역사에 관심이 많은 저에게 인천개항박물관 취재는 설레기도 했지만, 인천 개항에 대해 깊이 있게 공부해 본 적이 없어서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어요. 지금까지 인천은 공항과 항구가 같이 있는 도시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취재를 통해 인천과 조선말 개항의 역사에 대해 잘 알게 됐죠. 박춘화 해설사님의 설명 중 도크에서 힘들게 일하던 우리나라 사람 중에 김구 선생님이 계셨다는 점, 조계지는 치외법권이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합리한 대우를 받았던 점이 인상 깊었어요. 일본의 강압 때문에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으로 인천을 개항하게 된 사실이 매우 속상했지만, 개항으로 인해 우리나라에 많은 신문물이 들어올 수 있었어요. 아직까지 인천 곳곳에 남아있는 개항기의 흔적들과 근대식 건물들을 보며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권도준(서울 구룡초 4) 학생기자

인천개항박물관 취재를 계획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인천국제공항’과 ‘차이나타운’이었어요. 인천은 세계와 한국을 연결하는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역동적인 도시이기 때문에 기대가 컸죠. 인천개항박물관에서는 인천항 개항에 관한 자료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당시 인천의 상황과 일본이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박춘화 해설사님께서 인천은 ‘최초’가 많은 곳이라고 설명하셨는데, 박물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등 인천을 통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다양한 자료들도 전시돼 있었어요. 박물관 건물이 예전에 일본 제1은행의 인천지점으로 실제 사용된 이국적인 석조건물이었는데, 당시 사용한 실제 금고도 둘러볼 수 있었어요. 저에게 이번 취재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에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현재 국제적인 항구 도시로 발전한 인천에 대한 자랑스러움의 두 가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박시오(서울 대치초 4) 학생기자

글=성선해 기자 sung.sunhae@joongang.co.kr, 사진=임익순(오픈스튜디오), 동행취재=권도준(서울 구룡초 4)·박시오(서울 대치초 4)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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