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문학상' 김동인이 8.15 당일에 한 어이없는 짓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지난 5일 자 <조선일보> 기사는 동인문학상을 소개하며 "작가·독자 모두의 축제"라고 썼다. |
ⓒ 조선일보 |
1900년 10월 2일 출생한 김동인은 순수문학인으로도 보기 힘든 인물이다. 1925년에 발표한 <감자> 등은 순수문학으로 평가받지만, 1930년대 작품들은 그렇게 평가하기가 힘들다. 1930년대부터는 세상 조류에 휩쓸려 친일적인 정치 색채를 노출했기 때문이다.
김동인이 왕성하게 활동한 20세기 전반기의 가장 인상적인 정치 현상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동향이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을 침략하거나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이 이 시대의 가장 정치적인 현상이었다.
그런 현상이 심화되던 1930년대에 김동인은 그 흐름에 직접 뛰어들었다. 일본제국주의를 지지하는 문학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그가 남긴 친일 소설이나 산문으로 <일장기 물결 - 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 <출정하는 자제에게 주는 말>, <문화인의 총궐기>, <결전 신년의 교훈>, <남경조약>, <아부용>, <제재문제>, <고구마> 등을 예시한다. <감자>를 쓸 당시에는 순수문학인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고구마> 등을 쓸 때는 제국주의에 편향된 정치적 작가였던 것이다.
▲ 2010년 11월 26일 서울행정법원은 김동인의 유족이 낸 소송에서 "김동인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처분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
ⓒ 한국일보 |
그가 얼마나 과감하게 일제를 찬양했는지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들에서도 드러난다. 이 신문의 1942년 1월 6일 자 기사 '태평양송(頌)'에서 그는 영국과 미국도 태평양을 자기 바다라고 말하지 못했다면서 "인류에게 향하여 큰 소리로 능히 이렇게 부르짖고 이 권리를 주장할 지위와 실력을 가진 자는 오직 우리 일본 밖에는 없다"고 단언했다. 일본은 태평양을 일본해로 부를 자격이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은 인물이다.
또 1월 23일 자 기사 '감격과 긴장'에서는 "대동아전쟁이 발발되자 인제는 내선일체도 문젯거리가 안 됐다"라며 "지금은 다만 일본 시민일 따름이다. 한 천황폐하의 아래서 생사를 같이하고 영고(榮枯)를 함께할 한 백성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뛰어넘어, '내'와 '선'을 가릴 것도 없는 '한 백성'이 됐다고 주장한 것이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2권에서 김동인의 친일 행위로 학병·징병 선전·선동, 대동아공영권·내선일체·황민화 선전·선동, 문학계 문필보국운동 주도 등을 열거했다. 문학인의 정체성을 뛰어넘어 일제 선전·선동가의 족적을 남겼던 것이다.
그의 친일이 도를 넘었다는 점은 백제 땅을 내선일체의 성지로 미화하는 작품을 쓴 데서도 증명된다. 1941년 7월 8일 자 <매일신보> 3면에 소개된 소설 <백마강>이 그것이다.
이 기사는 "내선일체의 성지 백제를 배경으로 신체제에 즉응하여 역사소설의 신기원을 만들고자 눈물겨운 고심을 거듭하여" 만든 작품이 <백마강>이라면서 "작자는 이 백제 말년의 비극에서 처음으로 불타는 열정과 시혼(詩魂)의 약동을 느꼈다 한다"라고 전했다.
기사에 인용된 '작자의 말'에서 김동인은 왜국 군대가 660년에 멸망한 백제를 되살리려 한 사실을 거론하면서 "이 소설에서는 바야흐로 쓰러지려는 국가를 어떻게든 붙들어 보려는 몇몇의 백제 충혼과 딴 나라일망정 서로 친근히 사귀던 나라의 위국(危局)에 동정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협력한 몇몇의 야마토 사람의 아름답고도 감격한 행위를 줄거리로 하고 비련에 우는 백제와 야마토의 소녀를 배(配)하여 한 이야기를 꾸며보려는 것"이라고 작품을 소개했다.
김동인은 <백마강>을 통해 백제를 되살리고자 했던 일본인들의 아름답고 감격적인 이야기를 구성하고자 했다. 지금 전쟁 중인 일본이 예전에 백제를 살리고자 군대를 보내준 적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이다. 일제가 수행 중인 전쟁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원을 끌어낼 목적을 담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김동인의 친일 수준
<조선일보>는 동인문학상 시상을 통해 김동인을 한국 문학의 사표로 형상화시키고 있지만, 김동인은 문학의 내용뿐 아니라 행동 처신에서도 세상의 사표가 되기에 부족했다.
<친일파 99인> 제3권에 수록된 문학평론가 임규찬의 기고문 '김동인: 예술지상주의의 파탄과 친일 문학가로의 전락'이 <매일신보>를 근거로 소개한 1938년 일화가 있다. 김동인이 중병 때문에 매일 누워 신문만 읽고 바깥 활동을 못해 애태우던 시절의 에피소드다.
병석에 누운 김동인은 일본군이 승승장구하고 친일파들이 분주히 활동하는 모습을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건강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스스로를 보면서 "자신을 부끄러이 여기고 자탄해 마지 않았다"고 <매일신보>에 회고했다.
그해 11월 중순이었다. 병석에 누워 있던 그가 간신히 몸을 일으키게 됐을 때였다. 이때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있다. "즉시 택시로 총독부로 달려갔다. 학무국의 문을 두드렸다"라고 김동인은 썼다. 택시를 타고 총독부에 달려간 것은 자신을 해외에 파견할 황군 위문단으로 임명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퇴짜였다. 지원자가 많아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친일파 99인>은 "다시 한번 김동인은 최재서 등과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를 찾아가 위문을 허락받는다"라고 설명한다.
김동인의 친일이 어느 수준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히로히토 일왕(천황)이 항복을 선언하기 2시간 전인 1945년 8월 15일 오전 10시경에 총독부의 아베 다쓰이치 정보과장을 만나 사업 제안을 한 일이다.
김동인의 글인 <망국인기>를 근거로 <친일파 99인>이 소개한 바에 따르면, 김동인이 아베 과장을 찾아간 것은 '문인들이 사업을 해주면 최고 50만 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김동인 자신의 사업 구상을 설명하기 위해 8·15 당일에 총독부를 찾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총독부 과장과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아베 과장이 오전 10시 정각에 전화를 받더니 "은행에구 우편에구 간에 예금이 있거든 홀랑 찾게"라며 장시간 통화를 하는 바람에 그는 그냥 나오고 말았다고 김동인은 <망국인기>에 썼다. 재산을 정리해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는 총독부 관료 앞에서 친일 사업 구상을 밝히려다가 할 말을 못 하고 나왔던 것이다.
▲ 2020년 11월 27일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학연구회와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는 서울 정동 조선일보 미술관 앞에서 친일 문인인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폐지할 것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
ⓒ YTN |
<친일파 99인>은 그랬던 김동인이 1930년대 들어서는 가난에 시달렸다고 말한다. "이제 스스로 돈을 벌어야만 했는데, 그것은 원고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가 가난해진 이유는 박종화의 글에서 드러난다.
1930년대부터 김동인의 친일 집필 및 활동이 활발했다. 총독부 기관지에 친일 기사를 쓰는 것은 물론이고 친일 소설과 산문도 많이 썼다. 조선문인보국회 간사 자리를 청탁해 얻어내기도 했다.
위의 진상규명보고서에 인용된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백마강>을 집필하기 위한 충남 부여 현지 조사도 <매일신보>와의 협조하에 이뤄졌다. 기사는 그가 <매일신보>의 파견을 받고 현지 조사에 착수했다고 말한다. <매일신보>의 비용 지급이 있었음을 추론케 하는 대목이다.
이런 점들은 1930년대 후반 이후에 김동인 생활비의 상당 부분이 친일 행위로 얻은 재산에 기초했음을 보여준다. 일제가 망하는 줄도 모르고 해방 당일에 총독부 아베 과장을 찾아갔을 때도 사업비 50만 원을 얻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울의 중급 가옥이 1000원이 안 되던 시절에 거액의 친일 자금을 얻어내려 했던 것이다.
위와 같은 김동인의 행적들은 친일 역사소설의 신기원을 이룩하고자 고심한 '일제 선전·선동가'를 기리는 동인문학상이 존재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사회의 양심이 돼야 할 문학인들이 이런 상으로 인해 자기 이름을 더럽힐 이유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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