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R 나선 의사 “홍대 가 술 더 마시자던 구경꾼, 끔찍”
핼러윈을 맞아 인파가 몰린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154명이 숨진 ‘압사 참사’가 발생한 가운데 당시 현장에서 심폐소생술(CPR)에 나섰던 한 의사가 참혹했던 사고 상황을 전했다.
자신을 의료계 종사자라고 소개한 작성자 A씨는 30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이태원 현장에서 끔찍했던 것’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그는 “이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가 사고 소식을 듣고 CPR은 할 줄 아니까 도움이 될까 싶어 이태원으로 갔다”고 운을 뗐다.
그는 “평상시에도 무딘 편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막상 가니 끔찍했다. 몇십m 전방부터 구급차 소리에 울음소리에 아수라장(이었다)”면서 “경찰 통제에 (나는) 도우러 온 의료진이고 CPR 할 수 있다고 하니 들여보내줬다”고 말했다.
A씨는 “이미 바닥에 눕힌 사람들은 얼굴이 질리다 못해 청색증이 와 있는 수준이었다”며 “응급구조사가 눕힌 사람 한 명에게 CPR을 하는데 코에서 피가 나고 입에서도 피가 나오고 있었다. 내가 이 사람을 살릴 수 없겠구나 싶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그 와중에 가장 끔찍했던 건 현장을 바라보고 있던 구경꾼들이었다”며 “앰뷸런스에 환자가 실려 떠나고 잠시 쉬려고 서 있는 구급차 뒤에서 물을 마시는데 지나가는 20대가 ‘아씨, 홍대 가서 마저 마실까’ 하고 말하는 걸 듣고 정말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몸서리가 쳐졌다”고 토로했다.
이어 “아무리 CPR을 해도 맥박이 돌아오지 않았던 사람, 무능한 의사가 된 듯한 기분도 끔찍했지만 타인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다음 술자리를 찾던 그들을 평생 못 잊을 것 같다”며 “더 이상의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다른 의료인 B씨도 해당 글에 댓글을 남겨 “나도 거기 있다가 처음으로 인간에 대한 혐오감을 느꼈다”고 동조했다. 그는 “시신 사진 찍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여태까지 꽤 많은 죽음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어제는 충격이 너무 크다. 가망 없는데도 친구 살려 달라고 울고불고 난리 치는 친구 때문에 그만둘 수가 없었다. 자꾸 떠오른다”면서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호소했다.
그는 “너무 갑작스러운 사고여서 그런지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구조대도 바빠서 환자 분류해줄 인력도 없었고 기도 유지기 하나도 없는 거 보고 진짜 허탈했다”면서 “살릴 수 있었던 애들도 많았는데, 미치겠다”고 괴로워했다.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사망자는 30일 오후 5시30분 기준 여성 1명이 추가로 숨지면서 총 154명으로 늘었다. 132명도 부상을 입어 무려 28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망자 중 여성은 98명, 남성은 56명이다.
현장 구조에 참여했던 의사 이범석씨는 이날 YTN 인터뷰에서 “CPR을 계속 진행했는데 대응인력이 정말 부족하다고 하는 것을 느꼈다”며 “어떤 의료진은 부족한 인력 때문에 혼자서 몇십분 동안 교대 없이 CPR을 진행했다. 저 역시 진행하는 상황에서 다른 분께서 교대를 해주시자마자 바로 다른 환자분한테 가서 CPR을 진행할 정도로 현장대응 능력이 부족했다”고 전했다.
그는 “지난 여의도 불꽃축제 때도 많은 인파가 올 거라는 걸 예상하고 여의도 일대를 전면 차량 진입불가 조치하고 큰길을 비워둔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핼러윈 축제도 차량통제 등 가능한 예방조치를 실시하고, 긴급상황에서 구급차나 구급대원들이 더 신속하게 현장에 오셔서 구조작업에 투입할 수 있었더라면 더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 이 상황에서는 제일 힘드시고 도움이 필요한 분들이 유족분들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더 많이 살리지 못한 점에 대해서 죄송하게 생각한다. 의료진이 아닌 당시 구조작업을 도와주셨던 일반 시민분들도 큰 트라우마와 죄책감에 힘드실 텐데 용기 내서 도와주신 점 너무 감사드린다. 필요하신 분들은 꼭 정신과 상담과 치료를 받으시기 바란다”고 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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