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사니] 빵의 의미와 제빵사의 덕목
3년 전에 채원(당시 24세)이는 우리 팀 인턴이었다. 계약 기간이 끝날 때쯤 물었다. 바로 취업 준비할 생각이니? 채원이가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제빵왕이 될 거예요. 농담 반이 아니라 농담 99%였지만 뭐랄까, 그 허무맹랑한 표현이 좋았다. 난 그동안 수고했다며 가정용 제빵기를 선물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가격이 10만원 언저리였던 것 같다. 빵이란 게 먹는 건 누구나 잘할 수 있지만 만드는 건 또 다른 문제여서 제빵왕이 되려면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할 터인데, 그 뒤로 제빵기를 얼마나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다.
마약왕, 네고왕, 패션왕, 반칙왕, 해적왕 등 영화나 드라마에서 왕의 칭호를 얻은 이들이 많은데 문득 제빵왕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산다. 동네에 유명한 빵집 2곳이 있다. 한 곳은 빵집 이름으로 본인 이름을 내건 김○○ 제과점이다. 6~7평쯤 되려나. 매우 좁다. 가게에 들어가면 저 안쪽에서 김○○ 사장님이 하얀 옷을 입고 빵을 만들고 계신다. 우유 식빵이 유명하다. 지금은 메뉴가 꽤 다양해졌지만 20여 년 전엔 식빵 하나였다고 한다. 입소문을 타더니 금세 유명해져 오픈 전부터 손님들이 줄을 길게 늘어선다. 분점 제의도 수차례 받았지만 전부 거절했다고 한다. 레시피가 같더라도 만드는 사람이 다르면 맛도 달라진다고 믿어서다. 장인의 고집이 느껴진다.
다른 한 곳은 ‘아○○○○’라는 곳이다. 일본어 상호인데, 한국말로 ‘파랑새’라는 뜻이다. 벨기에 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명작동화 ‘파랑새’는 남매가 파랑새를 찾으려고 전전하다 결국 집 안 새장에서 발견했다는 내용이다. 행복은 먼 곳이 아닌 가까운 곳에 있다는 메시지를 담았는데, 이 작품명을 가게 이름으로 가져다 썼다. 일본인 제빵 장인이 새벽 4시부터 빵을 굽는다고 한다. 일본에는 흔하지만 한국에선 생소한 야끼소바빵(볶음국수빵)을 판다. 멀리서도 빵을 사러 올 정도로 빵 마니아들 사이에선 제법 유명하다.
이 두 빵집 주인의 어렸을 적 장래희망이 뭐였을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간판에 자기 이름을 내걸고, 제빵 장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그 순간만큼은 제빵왕을 꿈꾸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어쩌면 파랑새를 찾으러 떠난 남매처럼 지금도 그 여정 중일지도 모르겠다.
전국 3대 빵집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대전 성심당. 이곳의 창업자 고(故) 임길순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선에 오르면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1956년 빵집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힘든 사람에게 빵을 나눴다. 성심당 덕분에 대전에 굶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까지 전해진다.
굳이 빵 만드는 사람들의 얘기를 구구절절하는 건 빵은 조금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다. 소설 ‘레미제라블’에는 장발장이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치는 내용이 나온다. 가난해서 겪은 서러움을 표현할 때 흔히 ‘눈물 젖은 빵’이라고 한다. 소외된 이들을 돕고자 할 때 얼른 생각나는 것도 연탄 아니면 빵일 것이다. 그래서 빵은 경건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한 곳 베들레헴도 ‘빵의 집(house of bread)’이라는 의미다. 동화 ‘왕의 빵을 드립니다’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은 이런 사실을 깨닫고 아기 왕이 가난한 사람들의 배고픔을 잊게 할 빵과 같은 양식이 되어 주실 것이라며 기뻐한다. 그러면서 어서 고향으로 돌아가 우리도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달콤한 빵이 되자고 다짐한다.
한국에서 제빵왕이라고 불린 사람을 둘 꼽으라면 김탁구와 허영인이다. 김탁구는 2010년 큰 인기를 끌었던 KBS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극중 주인공 이름이고, 허영인은 SPC그룹 회장이다. ‘왕의 빵을 드립니다’는 초등학교 저학년 권장도서지만 그래도 허 회장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제빵왕은 매출액이나 가맹점 수 따위의 기준으로 얻어질 수 있는 타이틀이 아니다.
이용상 산업부 차장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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