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의 시시각각] 대한민국 치욕의 날
밤새 떨고 떨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탄식과 비탄의 굴레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끝내 분노가 터졌다. 정말 저 아수라장이 실제인가. 두 눈과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하는, 부질없는 소망도 품어봤다.
어젯밤 자정 무렵 남산 인근에 사는 지인의 갑작스러운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핼러윈 행사 중 압사 사고, 심정지 50여 명. 우리 집 앞으로 구급차 달려가는 소리가 30분째 들림.’ 설마 했다. 한밤에 장난은 아닐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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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서 발생한 초현실적 참사
경제·문화강국의 부끄러운 민낯
기성세대는 통절한 참회록 써야
」
바로 TV를 켰다. 긴급 뉴스가 쏟아졌다. 지인이 전해준 소식 그대로였다. 서울 이태원에서 발생한 참극을 목격했다. 이태원 좁은 골목에 널브러진 젊은이들, 심폐소생술에 매달린 소방대원들, 그 주변에서 절규하는 시민들 등등, 한마디로 무간지옥이었다.
트위터·페이스북 등 SNS도 둘러봤다. 상황은 더욱 심각했다. TV 화면보다 더 고통스러운 현실과 마주쳤다. 더는 SNS를 찾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만 깊어졌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또 있을까.
TV 속보를 지켜봤다. 시간이 흐를수록 절망감이 깊어졌다. 용산소방서장의 브리핑이 거듭될수록 실낱같던 희망도 사라졌다. “대체 핼러윈이 뭐길래”라는 욕지기마저 터졌다. 건물이 무너진 것도, 불이 난 것도, 테러가 터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서울 한복판에서 어떻게 150여 명의 막대한 사망자가 발생했는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 어떤 재난영화에서도 느끼지 못한 공포와 전율이었다. 모멸감만 쌓였다.
2022년 10월29~30일. 우리는 이날을 치욕의 날로 기록해야 한다. 세계 10대 경제강국, 지구촌을 움직인 K컬처의 이면을 똑똑히 확인했다. 그 밑바닥이 얼마나 부실하고, 불안한지를 목도했다. ‘위험사회’ 대한민국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부조리극도 이만한 부조리극이 없다.
기자 개인적으론 와우아파트 붕괴(1970), 성수대교 붕괴(1994), 삼풍백화점 붕괴(1995), 세월호 침몰(2014)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한 충격을 받았다. 같은 인재임에도 이번 참사는 오직 사람의, 사람에 의한,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비극이기 때문이다. 1960~70년대 가난한 시절에 종종 일어났던 귀성객 압사 사고가 바로 기억났지만, 그때와 비할 수 없이 부강한 2022년의 악몽이라는 점에서 더욱 비현실적이었다.
이번 비극의 원인은 다각적·중층적이다. 핼러윈을 코앞에 둔 주말, 그것도 코로나19 압박에서 벗어나 3년 만에 열린 행사라는 점에서 그간 억눌렸던 청춘의 폭발이 직접적인 배경이다. 10만 인파가 몰릴 것을 예상하고도 안전장치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행정적 책임도 막중하다.
가장 크게는 생때같은 젊은이를 보호하지 못한 기성세대의 직무유기를 들 수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불안과 혼돈의 사회를 물려준 어른들의 무책임에 고개를 들 수 없다. 한 해의 수확을 축하하고 이웃과 정을 나누는 핼러윈이 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파티로 변질한 데는, 특히 2000년대 이후 젊은이의 해방구처럼 급속히 소비된 데는 분명 기성세대가 부추긴 한탕주의가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어른들이 참회록을 쓸 시간이다. 아이들에게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 시스템을 넘겨주지 못한 과오를 반성해야 한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라는 윤동주의 고백처럼 말이다.
윤석열 정부도 최대 위기를 맞았다. 초대형 참사가 특정 정부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그 수습과 대책 마련에서 이번 정부의 능력이 판가름날 것이다. 찢기고 찢긴 국민의 상처를 어떻게 봉합할 것인지 열과 성을 다해야 한다. 경제도 안보도 결국 민심에서 시작하지 않는가. 정부는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삼가 고인과 유족의 평화를 기원한다.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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