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일본은행만 ‘저금리’를 고집할까[송승섭의 금융라이트]
기준금리 '확' 올리는 주요 선진국과 역행
BOJ 총재 "日 물가상승률, 일시적 현상"
일본국채만 1000조엔, 금리 올리면 이자↑
편집자주 - 금융은 어렵습니다. 알쏭달쏭한 용어와 복잡한 뒷이야기들이 마구 얽혀있습니다. 하나의 단어를 알기 위해 수십개의 개념을 익혀야 할 때도 있죠. 그런데도 금융은 중요합니다. 자금 운용의 철학을 이해하고, 돈의 흐름을 꾸준히 따라가려면 금융 상식이 밑바탕에 깔려있어야 합니다. 이에 아시아경제가 매주 하나씩 금융이슈를 선정해 아주 쉬운 말로 풀어 전달합니다. 금융을 전혀 몰라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로 금융에 환한 ‘불’을 켜드립니다.
[아시아경제 송승섭 기자] 가파른 물가상승률을 잠재우기 위해 미국 등 세계 주요국이 기준금리를 가파르게 올리고 있습니다. 미국은 3차례 연속으로 기준금리를 0.75%포인트 올렸고, 한국은행도 7·10월 유례없는 두 차례의 빅스텝(0.50%포인트 인상)을 밟았죠. 그런데 일본만 그대로입니다. 아직도 0%대 기준금리를 유지하고 있는데요, 왜 일본만 저금리를 고집하고 있을까요?
일본은행(BOJ)은 지난 28일 금융정책결정회의를 열고 단기금리를 -0.1%, 장기금리를 0±0.25%로 유지한다고 밝혔습니다. 장기금리가 0.25%를 넘어가면 일본은행이 채권을 무제한으로 사들여 금리상승을 막는 정책도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2016년 아베 신조 정부 때 시작한 마이너스 금리정책을 지금도 펼치고 있는 셈이죠.
물가상승률 충분하지 않다는 일본은행 총재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기준금리를 올리지 않는 이유로 ‘저물가’를 꼽아왔습니다. 다른 국가들이야 물가 상승률이 워낙 높으니 기준금리를 올려야 하지만, 일본은 아직 물가 상승률이 높지 않다는 거죠. 구로다 총재 본인도 올해 초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8%를 넘는 미국과 0.8% 정도에 그치는 일본은 환경이 전혀 다르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언제 기준금리를 올릴 것인지에 대한 기준으로는 ‘안정적인 물가상승률 2% 달성’을 제시했고요.
그런데 일본도 물가상승률이 오르는 추세입니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지난 4월 이후 일본의 전월대비 소비자물가지수(신선식품 제외)는 줄곧 2%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난달에는 직전 달보다 3.0% 올랐고요. 이는 2014년 소비세율 인상조치 때를 제외하면 1991년 8월(3.0%) 이후 31년 1개월 만에 가장 큰 증가폭입니다. 도쿄의 10월 물가는 전년대비 3.4% 올라 40년여 만에 최대폭을 기록했고요. 일본은행이 언급한 물가상승률을 초과 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일본은행은 지금의 물가상승이 ‘일시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에너지와 식품 등 변동이 심한 품목의 물가가 빠르게 올라 벌어진 일이라는 겁니다. 구로다 총재도 “임금 상승을 수반한 형태로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물가 상승은 아니다”라면서 “내년도에 목표로 한 물가상승률 2%를 안정적으로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본다”고 얘기했죠. 일시적인 물가상승 때문에 지금 당장 기준금리를 올리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日 국채잔액만 1000조엔…빚 무서워 기준금리 못 올린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일본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합니다. 빚이 너무 많다보니 금리를 올리면 일본이 갚아야 할 이자비용이 막대해진다는 겁니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일본의 국채 잔액은 1000조엔이 넘습니다. 한국 돈으로 약 9700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돈이죠. 국내총생산(GDP)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56%로 선진국 중에서 가장 높습니다. 금리가 1~2%포인트 오르면 일본 정부는 연간 원리금을 3조7000억~7조5000억엔 더 갚아야 합니다. 1%만 금리를 올려도 GDP의 2.7%를 이자지급에 써야 하는 구조입니다. 기준금리가 재정부담과 맞닿아있다 보니 인상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거죠.
지금 일본은행이 기준금리 인상을 시작하면 투자자들에게 위험 신호를 줄 수도 있습니다. 일본의 초저금리 정책은 아베 전 총리 때부터 10년 가까이 유지해 온 기조입니다. 이를 접고 기준금리를 올리면 ‘일본경제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구나’하는 신호를 줄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를 우려하는 일본은행의 태도를 외신에서는 ‘안이한 정책(easy policy)’이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일각에서는 일본의 경제성장을 위한 고집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일본은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불리는 장기 저성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기준금리를 낮게 유지하면 환율이 오르고 국제시장에서 가격경쟁력이 생기기 때문에 수출기업의 수익과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죠. 지난달 닛케이도 “(일본은행이) 코로나19 판데믹에 흔들린 경제 성장을 제고하기 위해 통화 완화 정책을 고집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초저금리에 추락한 엔화가치…24년만의 외환개입이미 부작용은 곳곳에서 관측되고 있습니다. 엔화가치가 지나치게 떨어진 게(환율급등) 대표적이죠. 올 초만 해도 달러당 115엔대였던 엔화가치는 지난달 145엔대까지 치솟았습니다. 그러자 일본 외환당국은 24년 만에 외환시장에 개입해 달러화를 팔아치웠습니다. 지난 20일에는 32년 2개월 만에 처음 150엔을 돌파했고요. 이에 공식적으로 외환시장 개입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복면개입’으로 환율안정 조치에 나선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준금리를 높이지 않으면 또다시 환율이 치솟을 수 있습니다. 환율을 안정시키려면 일본 외환당국이 계속 달러를 팔고 엔화를 사야 한다는 뜻입니다. 현재 일본 내 언론들은 당국의 시장개입 규모를 9조3000억엔(약 90조원)으로 유추합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당분간 기준금리를 계속 올릴 것이기 때문에, 일본의 외환준비고가 180조엔(약 1750조원)에 달한다고 해도 환율을 유지하는데 한계가 있을 거라고 우려합니다.
환율 상승을 막지 못하면 일본 내 물가가 더 오를 수도 있습니다. 기름값이나 식자재부터 각종 수입물가가 오르면 국민은 더 비싼 돈을 내고 생활해야 하죠. 물가상승률만큼 임금이 오르지 않으면 실질소득이 감소하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은 가만히 앉아서 자신의 구매력이 사라지는 걸 지켜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일본은행이 당분간 초저금리 정책을 고수할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입니다. 구로다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 28일 “필요한 시점까지 금융 완화를 지속할 것”이라며 “필요하다면 주저 없이 추가적인 금융 완화 조치를 마련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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