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룹' 속 여장남자, 실제 역사에선 이랬다
[김종성 기자]
▲ tvN <슈룹>의 한 장면. |
ⓒ tvN |
조선시대 왕실교육을 다루는 tvN 사극 <슈룹> 제2회에서는 중전 임화령(김혜수 분)이 깜짝 놀라는 장면이 있었다. 그는 인적이 없는 대궐 구석 으슥한 방에 홀로 들어간 계성대군(유선호 분)을 몰래 엿보게 된다. 뒤이어, 두 손으로 입을 막아야 할 정도로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계성대군은 작은 절구로 재료를 찧어가며 화장품을 제조하고 얼굴에 찍어보고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입술을 붉게 물들이고 얼굴에 분칠하는 색조 화장도 익숙한 손놀림으로 해내고 있었다. 벽면에는 빨간 저고리가 단정하게 걸려 있었다. 이처럼 아무도 없는 데서 그렇게 즐기다가 생활 공간으로 돌아가는 게 계성대군의 일상이다.
중전과 세자 모자에게 경쟁심을 갖고 있는 후궁 고귀인(귀인 고씨, 우정원 분)도 이 장면을 몰래 목격했다. 그가 깜짝 놀라는 장면으로 16일 제2회가 끝났다다. 22일 제3회에서 고귀인은 이 사실을 대비(김해숙 분)에게 보고했다가 호통을 들었다. 대비가 중전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보고를 하게 됐지만, 대비는 도리어 역정을 냈다.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사옵니다"라고 고하는 고귀인 앞에서 대비는 코웃음을 쳤다. "궁에선 말입니다. 본 것은 기억하지 말고, 들은 것은 잊어버리라 하였습니다"라며 "왜일까요? 그 말이 사실이면 그 아이가 죽겠지만, 아니라면 고귀인이 목숨을 내놓아야 하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라며 그는 위압감을 조성했다.
대비는 "그래도 똑똑히 보셨다 말씀하시겠습니까?"라고 확인차 질문을 던졌다. 긴장한 고귀인이 "확실하진 않지만 제가 본 건 분명 계성대군이었..."이라며 말을 흐리자, 대비는 탁자를 쾅 치켜 "확실하지도 않은 걸 지금 저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겝니까?"라고 버럭 역정을 냈다.
▲ tvN <슈룹>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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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룹>에 등장하는 이 같은 여장남자 이야기는 남장여자 이야기에 비해 역사 기록물(사료)에 훨씬 적게 등장한다. 여성이 남자 옷을 입고 먼 길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종종 접할 수 있지만, 남자가 그렇게 했다는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몸 전체를 여장한 사례는 아니지만, 남자가 여자 분위기를 풍긴 사례가 <삼국유사> 기이 편에 소개된다. <삼국유사>는 경덕왕을 뒤이어 765년 만 7세 나이로 즉위한 혜공왕이 "항상 부녀자의 놀이를 하고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했다"고 말한다.
<삼국유사>는 혜공왕이 그렇게 된 것은 그가 본래 여성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어린 임금은 여자로서 남자가 됐다"고 말한다. 이는 혜공왕이 여성 신분을 감추고 군주가 됐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성으로 태어났어야 할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혜공왕이 본래 여성이었다는 이야기의 진원지는 표훈대사다. 후계자가 없어 고심하던 경덕왕으로부터 "천제(天帝)에게 청해 아들을 갖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표훈대사는 <삼국유사> 기이 편에 따르면 하늘에 올라가 천자에게 왕의 부탁을 전했다.
천제의 대답은 '딸은 가능하지만 아들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를 전해들은 경덕왕은 표훈을 시켜 '그럼, 딸을 아들로 바꿔달라'고 천제에게 부탁했다. 천제는 '그렇게 해줄 수는 있지만 나라가 위태로워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 사연으로 태어난 아들이 혜공왕이라는 게 <삼국유사>의 설명이다. 본래 여자로 태어났어야 할 혜공왕이 남자로 태어난 뒤에 여자아이들의 놀이를 하고 비단주머니 착용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혜공왕 사례와 달리, 온몸 전체를 여장하는 일은 고려 말 이래의 공식 행사에도 있었다. 정약용(1762~1836)의 글을 모은 <다산 시문집> 제9권에 실린 상소문에 따르면, 임금이 직접 참관하는 알성시 과거시험의 급제자를 발표할 때에 그런 행사가 있었다. 방방(放榜)이라고 불린 이 행사 때에 남자 무용수가 여장 차림으로 공연을 하는 일이 있었다.
상소문에서 정약용은 고려 말부터 시행된 이 행사를 폐지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남자의 몸을 여자의 모습으로 변화시키니 귀신 같고 도깨비 같아 놀랍고 현혹됩니다"라고 한 뒤 "만약 후세에 문명이 발전한 뒤에 이런 일을 보게 된다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정약용의 예측과 달리 현대인들은 여장남자를 봐도 크게 놀라지 않지만, 그는 후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일이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장여자에 대한 그의 반응은 <슈룹> 제2회와 제3회에서 중전과 고귀인 등이 보인 반응과 비슷하다. 계성대군의 은밀한 모습을 보고 경악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슈룹>의 등장인물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 tvN <슈룹>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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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자기 주장을 보강하기 위해 공자가 인형이나 허수아비 제작을 경계한 사실을 거론했다. 공자가 그런 것을 만들지 못하게 한 것은 사람 형상을 본뜨는 일이었기 때문이라면서, 물건으로 사람을 본뜨는 것도 그처럼 경계해야 한다면 남자를 여자처럼 변장시키는 것은 더 경계해야 하지 않겠냐는 게 그의 말이다. 방방 행사 때 남자 무용수의 출연을 금지시키기가 당장에 어렵다면 복장만이라도 남자 옷을 입히자고 그는 건의했다.
정약용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정조 임금 때인 18세기 후반이다. 1392년에 건국된 조선왕조가 400년 정도 됐을 때였다. 여장한 남자 무용수가 등장하는 이런 행사가 고려 말부터 있었으니, 조정의 공식 행사에 여장 남자가 등장하는 광경이 아주 드물지는 않았던 것이다.
여장남자에 관한 혐오는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약용처럼 이익 역시 실학자였지만, 정약용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이 문제에서만큼은 실학자보다는 유학자의 태도를 견지했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단호한 입장이었다.
이익이 인용한 사례 중 하나는 명나라 때 이야기다. 그는 눈썹을 깎고 얼굴을 화장하고 여성 차림을 한 명나라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접근한 뒤 부적절한 일을 저지르는 일이 많았다면서 그들이 능지처참을 당했다고 강조했다. 여장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능지처참이란 말로 강조한 셈이다.
여장남자에 대한 기록들을 읽어보면, 여성의 남장에 대해서는 대체로 관대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1984년에 허미자 성신여대 교수가 쓴 <허난설헌>에 소개된 일화에 따르면, 유명 문인이자 허균의 누나인 허난설헌(허초희)은 혼담이 진행 중인 김성립이 어떤 남자인가 궁금해서 남자 노비 차림으로 아버지 허엽을 몰래 뒤따라가 김성립 집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아버지가 예비사돈 집에서 깜짝 놀라는 일이 있었지만, 능지처참을 거론할 정도의 극단적인 문화적 거부감은 표시되지는 않았다.
전 의령현감 서유영의 <금계필담>에 소개된 춘천 여성 우씨는 돈을 벌 목적으로 한양으로 갈 때 남장 차림을 갖췄다. 서유영은 우씨를 억척 여성으로 묘사했다. 우씨를 '귀신 같고 도깨비 같이' 묘사하지는 않았다.
남장여자에 대해서는 이처럼 비교적 관대했던 데 비해, 여장남자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이 꽤 컸다고 할 수 있다. 알성시 과거급제자를 발표하는 공식 행사에 여장남자가 등장하는 전통이 있었는데도, 남자가 여장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약용 같은 진보적인 학자들도 상당한 거부 반응을 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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