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크닉] 장난감을 뛰어넘은 90살 레고의 매력
비크닉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가 오면 아이 선물 쇼핑할 재미에 들뜨는 딸바보 마케터 한재동입니다. 어릴 적 산타 할아버지에게 바라던 최애 선물은 늘 레고였습니다. 가장 가지고 싶었던 레고 해적선은 가지지 못했지만 작은 모델들을 모아 상자에 넣어 이것저것 다양하게 만들며 놀던 추억이 있어요. 어느새 딸의 선물로 레고를 고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세월 참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레고는 훨씬 나이가 많았습니다. 올해가 레고 90주년이 되는 해라고 하는군요.
요즘 뉴스에는 ‘레고랜드’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던 레고를 이런 식으로 뉴스에서 볼 줄은 몰랐지만, 쟁점이 되니 레고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분들도 많아진 것 같아요. 오늘은 논란이 되고 있는 레고랜드 사태와는 별개로, 마케터이자 팬의 입장에서 브릭 완구의 절대자로 군림하고 있는 레고(LEGO)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레고의 처음은 브릭이 아니었다
레고는 ‘STUD’라는 결합을 위해 튀어나온 단추 모양 돌기가 있는 플라스틱 블록입니다. 블록을 쌓거나 연결해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드는 것을 브릭 완구라고 해요. 그리고 레고는 브릭 완구의 대명사고요. 그런데 사실 레고가 처음부터 플라스틱 블록을 만든 것은 아니에요. 레고의 시작은 창업자 ‘올레 키르크 크리스티얀센(Ole Kirk Kristiansen)’이 1932년 덴마크의 빌룬트에서 운영하던 목공소였습니다.
올레의 목공소 주력 사업은 원래 주택 건축과 리모델링이었지만, 대공황으로 기존 사업이 어려워지자 대신 목재로 장난감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해요. 이 결정이 바로 장난감 왕국 레고의 시작이었습니다. 장난감에 대한 반응이 좋아서 목공소는 위기를 넘겼고, 1936년 회사의 이름을 LEG GODT(덴마크어로 잘 놀다라는 뜻)에서 영감을 받은 ‘LEGO’라고 짓게 돼요.
레고의 목재 장난감 사업은 승승장구해요. 심지어 2차세계대전 기간에도 장난감을 생산해서 매출이 늘었다고 합니다. 1946년 플라스틱이라는 새로운 물질의 등장에 레고는 또 한 번의 큰 도전을 해요. 비싼 플라스틱 사출 성형기를 사는 등 과감한 투자를 통해 플라스틱 브릭 완구를 개발합니다. 그리고 1949년 레고 최초의 플라스틱 브릭이 나오게 돼요. 초반의 레고 플라스틱 브릭은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지금처럼 단단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쌓아 놓는 수준이었거든요. 그러다 1958년 브릭을 튼튼하게 연결할 수 있는 신기술 ‘Stud and Tube’가 개발되며 레고는 브릭 완구의 절대 강자가 됩니다.
레고의 위기 탈출 넘버원
레고는 1960년대 미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적으로 공장과 판매처를 확장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기 시작합니다. 듀플로와 같은 영유아 대상 제품의 성공, 역할극을 가능하게 한 미니 피규어의 개발 그리고 시티, 캐슬, 스페이스와 같은 메가 히트 브릭 테마의 출시 등 전 세계 완구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죠. 레고 오너 일가는 창립자의 아들과 손자까지 3대에 걸쳐 기업을 이어받으며 90년대까지 레고의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90년대 중반이 지나 레고의 독점 특허가 만료되자 호환되는 저가 플라스틱 블록을 생산하는 경쟁자가 등장했어요. 결정적으로 비디오 게임이라는 게임체인저가 등장합니다. 레고의 성장세는 더뎌지며 결국 98년 처음으로 적자가 나기 시작했어요. 레고는 이를 사업 다각화로 극복하려는 실수를 범합니다. 의류와 시계부터 출판 미디어 게임에까지 진출하고 테마파크인 레고랜드를 사업을 확장합니다. 결국 2004년 파산 위기를 맞고 바비인형 제조사인 마텔(Mattel)에 인수된다는 소문까지 돌게돼요.
이때 레고가 위기를 극복한 이야기는 꽤 유명합니다. 많은 마케팅 스터디에서 주제가 되었어요. 우선 3대에 걸친 창업주 가족 오너가 물러나고 맥킨지 출신의 전문경영인을 기용합니다. 그리고 유명한 “Back to the Brick(브릭으로 돌아가자)”라는 메시지와 함께 무리하게 확장한 사업들을 정리했어요. 테마파크 지분을 매각하고 의류와 시계 사업도 정리했어요. 비디오 게임 쪽 인력도 축소했습니다. 제품을 지나치게 다양화하며 생긴 특수 브릭들을 줄이고 기본 브릭의 활용률도 올리며 효율성을 챙겼지요.
내부의 비효율을 정리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외부 IP를 받아들여 신규제품을 출시했습니다. 그간 독자적인 캐릭터로 성공을 해왔던 레고로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해요. 힘든 과정을 거쳐 출시된 외부 IP의 첫 번째 제품이 ‘스타워즈’ 인데, 공전의 히트를 하게 됩니다. 이후 해리포터, 배트맨, 스파이더맨, 반지의 제왕 등 레고는 키덜트라 불리는 성인층까지 고객을 확장합니다.
레고의 매력 예송논쟁 : 유명 IP의 구현인가, 무한한 창의성인가
성인 레고 팬을 ‘AFOL(Adult Fan of Lego)’이라고 불러요. 레고가 추정한 세계 AFOL의 수는 100만 명이 넘고, 연간 레고 판매량의 20% 정도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주변에서도 이제는 레고가 취미라는 성인들을 꽤 접할 수 있는데요. 키덜트라는 단어에서 부정적인 뉘앙스가 사라지며 “어른이 왜 애들 장난감을 가지고 노냐”는 말은 정말 옛날이야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성인들이 레고에 열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유명 IP를 브릭으로 구현할 때 느끼는 즐거움 때문이라고 합니다. 스타워즈, 디즈니, 마블 캐릭터는 물론이고 건축물을 정교하게 구현한 레고 아키텍처 시리즈와 유명 스포츠카 등을 구동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레고 테크닉 시리즈는 많은 매니아층을 보유하고 있어요. 현재욱 레고코리아 시니어 브랜드 매니저의 인터뷰에 따르면 코로나19가 유행한 2020년 이후로는 인테리어 소품, 명화, 식물 등까지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제품까지 범위를 넓혔다고 해요. 덕분에 지난해 글로벌 매출은 전년 대비 27% 증가했고요.
반면 레고의 매력은 역시 창의성이라는 분들도 많아요. 프라모델처럼 정해진 매뉴얼대로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고 부수기를 반복하며 다양한 작품을 만드는 것을 즐기는 겁니다. 이 주장을 대표하는 분들을 브릭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는데요. 브릭 아티스트란 브릭으로 예술작품을 만드는 작가를 뜻하는데, 이들 중 레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작가들을 ‘LCP(LEGO® Certified Professional)’라고 해요. 세계적으로 22명인데 김성완, 이재원 등 한국 작가가 두 명이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7년 LCP ‘네이선 사와야(Nathan Sawaya)'의 전시가 흥행하면서 국내에도 본격적인 브릭아트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어요.‘브릭캠퍼스(Brickcampus)’같은 전시 콘텐트가 흥행했고, 공중파 예능에서 브릭아트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이 제작 되기도 했습니다. 매뉴얼 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팬과 창의적인 레고의 매력을 강조하는 팬 사이에 대립이 있을지 모르지만, 레고 입장에서는 두 팬층 모두 매출을 끌어올리고 있는 고객이라는 것입니다.
팬들이 스스로 축제를 만드는 브랜드
아이들은 브릭을 완성하면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예요. 레고의 팬들은 자발적으로 모여 서로의 브릭 작품을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북미와 유럽 지역에서 소규모 동호회 모임처럼 열리던 것이 커져 2000년에는 최초의 브릭 컨벤션 ‘브릭페스트(Brickfest)’가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열렸습니다.
수많은 세계의 브릭 컨벤션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레고 본사가 있는 덴마크의 스케르벡에서 열리는 ‘스케르벡 팬 위켄드(Skærbæk Fan Weekend)’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2013년부터 ‘브릭코리아 컨벤션’이 10년째 열리고 있어요. 레고는 팬들이 직접 컨벤션을 개최하도록 관여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어서, 레고가 직접 개최하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레고사의 이름을 걸고 다양한 후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레고가 대체 불가한 브랜드 위상을 가지고 있다지만, 정작 고객 관계에 있어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비판도 있어요. 특히 이번 인플레이션으로 가격 인상을 할 때 국내 고객의 불만이 표출되기도 했습니다. 올해 8월 1일 일부 상품의 가격을 최대 25% 정도 인상했는데, 고객들이 제대로 된 공지를 받지 못했다는 거예요. 레고 커뮤니티들에서는 해당 사태에 대해 고객과의 소통에 소홀한 레고코리아의 태도를 비판했습니다.
10년뒤, 100살의 레고는 어떨까요?
코로나19로 사람들이 집안에서 레고를 가지고 놀게 되면서 레고 매출은 2021년 전년 대비 27% 성장한 74억 유로라는 놀라운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물론 팬데믹으로 모든 장난감 업계가 호황을 맞는 상황이었어요. 레고의 성장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결국 장기적으로 아이들의 시간을 점유하는 ‘경쟁 놀이’와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바로 ‘디지털’이고요.
레고는 이미 다양한 디지털 전략을 시도했어요. 2004년 가상공간에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레고 디지털 디자이너(LEGO Digital Designer)’라는 프로그램을 무료로 배포해서 팬들의 환호를 받았습니다. 2007년에는 레고의 팬들이 자기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투표 등을 통해 상용화까지 가능한 ‘레고 아이디어스(LEGO Ideas)’라는 온라인 플랫폼을 만들기도 했어요.
증강현실을 이용한 인터랙티브 블록을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2020년 닌텐도와 협업을 통해 인터랙티브 블록 ‘레고 슈퍼 마리오’를 출시했고, 2021년에는 증강 현실 기술을 이용해서 자신만의 뮤직비디오를 만들 수 있는 ‘비디요(VIDIYO)’를 내놓기도 했어요. 디지털과 융합해 직접 만드는 즐거움을 주겠다는 전략이 보입니다.
닐스 크리스티안센 레고 CEO는 2021년 CNBC와 인터뷰에서 “단순히 온라인에서 레고를 파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전체 디지털 생태계와 그 미래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이건 장기적인 여정”이라고 말했어요. 절체절명의 위기들을 극복해온 아흔 살 베테랑 레고가 십 년 뒤 백 살이 되었을 때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한재동 han.jae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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