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의 진실게임이 주는 쾌감, 원작 뛰어 넘었다
15년이 넘도록 리뷰와 칼럼을 쓰고 있어도 어렵습니다. 문학소년, 영화청년으로 성장했어도, 이제는 몇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엎어지기를 반복해도 쉽지 않습니다. 이제는 늘 이야기를 고민하고 콘텐츠에 서사가 없으면 허전할 지경입니다. 어쩌면 세상 또한 개개인의 서사와 이야기로 구성될런지도요. 영화와 드라마를 그 서사와 이야기를 중심으로 탐구해 보겠습니다.[ <편집자말>
[하성태 기자]
"Everybody Lies.(누구나 거짓말을 하지)"
OTT 시대가 도래하기 전, '미드'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하우스>(House M.D.)의 명제는 이랬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과 <굿닥터> 데이비드 쇼어 등이 만든 이 의학 드라마는 괴짜 '진단의학과' 의사가 진단명이 불분명한 환자들의 병명을 끝끝내 밝혀내고야 마는 의학 추리 드라마였다.
그런데 웬 거짓말? 꾀병이든 사연을 밝히기 싫든, 환자들은 자신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려들지 않는다. 그 구구절절한 사연과 복잡다단한 심리를 꿰뚫는 것이 탐정 뺨치는 의사 하우스의 능력이자 극적 재미였다. 사실 그게 어디 환자들만의 특성이겠는가. 거짓말이야말로 포유류 중 뇌를 가진 인간만의 특질이자 인간이라서 가능한 '재능'아니겠는가.
이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는 명제가 전 세계 추리 문학의 근간이라는 사실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 또한 예외가 없다. 기억과 진술, 이를 영상으로 재구한 <라쇼몽>과 같은 걸작을 자세히 거론하는 것조차 따분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치지 않고 거짓말과 관련된 심리 게임을 쫓는 텍스트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거짓말이야말로 살아있다면 끝나지 않을 인류의 존재증명과도 같기 때문이리라.
제목부터 이러한 '진술'을 연상시키는 <자백>은 형식적으로 정갈해서 더 몰입감있고 매력적인 미스터리 스릴러다. 밀실 살인의 범인으로 의심 받지만 결백을 주장하는 유민호(소지섭)과 그의 무죄를 위해 사건을 재구성해가는 최고 승률을 자랑하는 변호사(김윤진)의 진술 게임 끝에 둘의 본질적인 욕망이 놓여 있다는 사실 또한 몰입감을 높인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 영화 <자백> 스틸 이미지. |
ⓒ 롯데엔터테인먼트 |
호텔방에서 습격을 받고 깨어났다고 했다. 검사들이 우습냐고, 사실을 말하라고, 그래야 승소한다고 으름장을 놓는 변호사 앞에서 유민호가 기억을 재구하기 시작한다. 진술 장소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함박눈이 내리는 유민호의 별장이다. <자백>도 그 진술을 영상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눈을 뜨기 직전, 내연녀 김세희(나나)와 호텔방을 떠나려했던 유민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김세희와 함께 협박범으로부터 10억을 요구 받고 그 중 얼마를 가지고 한적한 호텔방을 찾은 유민호는 경찰이 출동하자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감지하고 급하게 떠나려던 참이었다.
숨어있던 습격자가 자신을 공격했고, 김세희도 죽였다. 하지만 경찰이 출동해서 확인한 호텔방은 잠겨있었다. 유민호의 진술과 일치한다. 하지만 체포된 유민호는 구속되지 않고 이내 풀려났고, 변호사와 마주 앉은 참이다. 자, 이제 제대로 작전을 짜볼까. 그런데 웬걸. 이 변호사가 진실을 요구하자 모든 게 어그러진다.
사실 사건은 두 개였고, 시신도 두 개였다. 또 다른 사건은 3개월 전 일어났다. 불륜을 저지르고 서울로 향하던 외곽도로에서 유민호와 김세희가 로드킬을 피하려다 차사고를 일으켰고, 반대편 차량 운전자가 사망해있던 것.
이후 유민호가 차량과 시신을 처리하는 사이 김세희는 고장난 차를 고쳐주겠다는 한영석(최광일)의 호의를 받아들이지만 이내 사망한 차량 운전자가 그 한영석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운명이 우연처럼 급습한 가운데 유민호와 김세희는 돌이킬 수 없는 '나쁜 선택'과 구원 사이에서 최종적으로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유민호만이 알고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마련 아닌가. 그런데, 변호사가 무죄 주장을 위해 다른 시나리오를 제안한다. 두 번째 사건을 결부시키는 완전히 새로운 범죄 시나리오. 여기서 <자백>의 진짜 매력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 영화 <자백> 스틸 이미지. |
ⓒ 롯데엔터테인먼트 |
"고통 없는 구원은 없어요."
그러니까 일종의 이 진술게임이자 "진실을 말하라"는 변호사의 종용은 관객들과의 진실게임을 위한 이중의 장치다. 무죄를 받기 위해 최고의 변호사를 고용한 유민호의 진술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변호사가 제안하는 그럴싸한 시나리오야말로 진실이 아닐까. 이 진술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스크린으로 보고 있는 관객들은 진실을 마주하고 있는가.
에둘러 갈 것 없다. 스페인 영화 <인비저블 게스트>(넷플릭스 제목 <세번째 손님>)의 리메이크인 <자백>은 마지막 반전과 진상을 알려주기까지 대략 세 번에 걸쳐 이러한 진술과 진실게임을 반복하고 재구성한다. 정갈이란 표현을 쓴 건 그래서다. <자백>은 군더더기 없이 그 진실 게임 혹은 거짓말 게임을 깔끔하고 정교하게, 그리고 몰입도 놉게 이어가는 완성도를 자랑한다.
대개 실패한 리메이크가 성실한 독후감이거나 로컬라이징(지역화)에 실패하는 우를 탈피하는 것을 넘어 고유의 오리지널리티를 뽐낸다. 차가운 북유럽영화를 보는 듯한 영상을 이야기 구조에 온전히 녹여내는 동시에 후반부 결말이나 그를 향해 가는 과정 역시 독창적으로 승화시켰다.
이를테면, 원작에서 다소 흩뿌려진 진술 게임을 선 굵게 정리하는 한편 다소 어설펐던 디테일까지 무리없이 다듬으며 강조점들을 확실히했다. 진술에 따라 달라지는 인물들의 성격 창조나 연기 조율 또한 원작보다 진일보했다. 다시 말해, 원작의 매력적인 설정들을 솜씨 좋게 이식하는 것을 넘어 한국 관객들의 까다로운 눈높이에 걸맞은 상업영화로서의 미덕을 강화해낸 것이다.
원작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확인한 이라면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자백>의 로컬라이징이나 개작 과정은 매끄러움을 넘어 '원작을 뛰어넘는'이란 수식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전반부의 가지치기나 캐릭터의 성격화, 공간 배경 등 디테일이나 이로부터 이어지는 후반부의 원작엔 없는 설정까지. <자백>의 리메이크는 분명 성실하고, 또 독창적인 매력을 뿜어낸다.
한국적 신파? 당연히 없다. 그게 꼭 상업적이라기보다 매끄러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진술 게임의 장기말인 소지섭과 나나의 미세하면서도 이해 쉬운 연기톤 변화는 자칫 반복의 함정에 빠지를 우를 능숙히 비켜가는 <자백>의 백미 중 백미다. 이중 구태여 손을 들어준다면 나나에게 한 표를 던지겠다..
거짓말의 향연은 결국 욕망의 추구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욕망의 방향은 완전히 다르다. 무죄를 받고 완전범죄를 달성하기 위한 잔꾀와 일말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의 산물 중 <자백>은 한 쪽 손을 들어주는데 그러한 결말로 내닫는 과정까지의 장르적 온도나 영화적인 윤리를 끝끝내 지켜낸다. 이처럼 뒷맛이 개운한 한국 미스터리 스릴러는 실로 오랜만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