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연애, 비혼의 시대여서? 더는 ‘사랑’이 팔리지 않는다
사랑 노래 거부한 걸그룹
‘멜로퀸’ 명맥 끊긴 충무로
“야한 작품을 기대하셨다면/ Oh I’m sorry 그딴 건 없어요/ 환불은 저쪽.”
지난 25일 국내 음원 사이트 멜론을 포함해 지니·벅스·플로·바이브 등 5개 메인 차트 1위를 차지하며 ‘퍼펙트 올킬’을 달성한 그룹 ‘(여자)아이들’의 노래 ‘Nxde(누드)’의 가사다. 오페라 ‘카르멘’의 아리아 ‘하바네라’의 멜로디를 차용한 이 노래는 꾸며지지 않은 개인의 본모습을 ‘누드’라는 단어에 빗대어, 이 단어에 대해 외설적인 시선을 가진 이들에게 “변태는 너야”라며 대범하게 비판한다. 물론 이번에도 작사·작곡은 리더인 전소연이 했다.
최근 일본 오리콘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방탄소년단의 여동생 그룹 ‘르세라핌’의 신곡 제목도 ‘안티프래자일(ANTIFRAGILE·깨지지 않는)’이다. 가사 역시 “가렵지도 않아/ 내 뒤에 말들이 많아/ 나도 첨 듣는 내 라이벌” 등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이들의 욕망을 담았다. 특히 “잊지 마 내가 두고 온 토슈즈”는 15년 동안 발레를 한 멤버 카즈하의 심정을 노래한다.
이성애를 노래하지 않는 소녀들
2022년, 더 이상 여자 아이돌 그룹은 ‘이성애(異性愛)’를 노래하지 않는다. 4세대 아이돌의 선두 주자인 ‘에스파’는 가상공간 광야에서 악당 블랙맘바와 싸우고, ‘르세라핌’은 자신의 강인한 내면을 자랑하며, ‘(여자)아이들’은 성(性)을 사람들의 편견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아이브’는 나르시시즘(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에 대해 노래한다. 최근 새 앨범을 발표한 ‘드림캐쳐’의 타이틀곡 ‘비전’은 환경 보호 메시지를 담았다.
“사막보다 메마른 이곳의/ 채워질 수 없는 갈증/ 갈라진 땅 위 그 틈에/ 깃발을 세우고 맞서 싸워.”
과거엔 달랐다. 국내 여자 아이돌그룹이 부른 노래의 공통점은 ‘사랑’이라고 분석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청순하게 생머리를 흔들며 “나를 믿어 주길 바래/ 함께 있어”라며 ‘난 너의 소녀’임을 강조하는 ‘S.E.S’,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해달라고 애원하는 ‘핑클’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한 연예 기획사 임원은 “여자 아이돌 그룹의 승패는 얼마나 많은 여자팬들을 확보하느냐인데, 더 이상 팬들은 울고 웃는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이제는 사랑(이야기)이 팔리지 않는 시대”라고 말했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도 “젊은 세대, 특히 젊은 여성들의 비혼, 비연애의 비중이 크게 늘다 보니 연애보다는 자아실현, 사회 정의, 환경 보호 등에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고 말했다.
이는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과거 한국 드라마의 특징은 의학물도 병원에서 연애하기, 법정물도 법원에서 연애하기, 정치물도 국회에서 연애하기 등 ‘기-승-전-연애(戀愛)’였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만 러브라인이 깔려도 시청자들은 기겁한다. 잘 만들어진 드라마란 ‘러브라인이 없어도 재미있는 것’이라는 말이 공식이 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최근 화제에 오르며 종영한 드라마 ‘작은아씨들’에도 러브라인이 없다. 주인공인 김고은(오인주)과 위하준(최도일)은 그 많은 역경을 겪고도 사랑에 빠지려다가 만다. 넷플릭스 시리즈 ‘수리남’도 마찬가지다. 한 네티즌은 “과거 드라마였으면 국정원 여직원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것”이라는 댓글을 달았다. 영화 ‘헌트’도 원작에서는 이정재(박평호)와 고윤정(조유정)의 러브라인이 있었으나, 대본 수정 과정에서 감독인 이정재가 다 쳐냈다고 한다. 올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이 예상보다 관객 수가 많이 나오지 않은 것도, 더 이상 관객들이 사랑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스터리물인 ‘헤어질 결심’에선 박해일(해준)과 탕웨이(서래)의 러브라인이 깔린다.
충무로 멜로퀸 명맥도 끊겨
충무로의 ‘멜로퀸’ 명맥도 끊겼다. “견우야 미안해”를 외치던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 “이거 마시면 우리 사귀는 거다” 대사로 유명한 ‘내 머릿속의 지우개’의 손예진을 이을 여배우가 없다는 것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청순미를 보여준 수지가 그 자리를 잇는 듯했으나, 수지 역시 여성 최초의 소리꾼인 ‘도리화가’, 신분 세탁에 관한 드라마 ‘안나’ 등 진취적인 여성 연기에 더욱 관심이 많다. 최근 국내 박스오피스 화제작들도 범죄도시2, 한산, 헌트 같은 비멜로물이었다. 현재 개봉을 앞둔 유일한 멜로물인 조이현, 여진구 주연의 영화 ‘동감’은 2000년 개봉한 김하늘, 유지태 주연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이는 전 세계적인 트렌드이기도 하다. 할리우드에서도 맥 라이언, 줄리아 로버츠, 캐머런 디아즈, 레이철 맥애덤스로 이어지던 로맨틱퀸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용 데이트 영화도 2003년 ‘러브 액추얼리’, 2006년 ‘로맨틱 홀리데이’ 이후 잠잠하다. 물론 ‘홀리데이트’(2020년), ‘러브하드’(2021년) 등이 나오긴 했지만 전 세계를 사랑에 빠트릴 정도는 아니었다. 팝 시장도 머라이어 캐리가 1994년에 발표한 곡 ‘올 아이 원트 포 크리스마스 이즈 유’가 여전히 1위다.
전문가들은 이성에 대한 사랑 이야기가 줄어든 것은 대중문화가 담아야 하는 사랑의 종류가 많아졌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정치적 올바름(PC)’ 영향이라는 것이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나가는 청춘 배우인 젠데이아의 대표작도 트랜스젠더인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드라마 ‘유포리아’다. 심지어 지난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티탄’은 자동차와 성관계를 나누고 금속 혼혈아를 낳은 여성이 가짜 아버지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사랑의 형태가 상상 이상으로 다양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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