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힘을 다해 목을 졸랐는데 '더 세게 하라'니 [양민영의 한 솔로]

양민영 2022. 10. 28.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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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영의 한 솔로] 주짓수와 부상

[양민영 기자]

▲ 주짓수 방어 몸이 깔린 상황에서 탈출을 시도할 때 귓바퀴가 쓸린다.
ⓒ 양민영
지금은 폐업한, 그 이름도 귀여운 토마토 의원의 원장님은 나의 주치의였다. 그는 내가 진료실에 들어설 때마다 반가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하루 중 가장 무료한 시간에 찾아오는 수상쩍은 환자. 통증을 달고 오는 부위는 다양하다. 어느 날은 손가락, 손목이 아프다고 했다가 별안간 팔꿈치 통증을 호소하고 뜬금없이 목이나 허리가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다. 한편으론 일관성이 있는 게 아픈 부위들이 전부 관절에 속했다.

진료는 말이 진료이지 백발이 무성한 원장님과 함께 연출하는, 윙크를 신호로 시작되는 역할극이나 다름없었다. 치료는 평범하지만 그곳이 좋았던 이유는 마음 놓고 엄살을 잔뜩 부릴 수 있어서였다. 특히 나는 엄살을 잘 받아주는 의료인을 잘 알아보는데(누울 자리에 발을 뻗어야 하니까) 토마토님은 그런 면에서 제격이었다. '삐었다'든가, '꺾였다'라는 말로 다친 경위를 설명하면 그는 잠자코 엄살을 받아주다가 이렇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아가씨가 범인 잡는 형사예요?"

언제는 운동선수냐고 묻더니, 그사이에 새로운 가설을 세웠나 보다. 그러면서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얼른 화제를 바꾸곤 했다. 마치 자신이 다른 가설을 또 세울 수 있게 내버려 두라는 듯이. 그렇게 해서 토마토님의 무미건조한 하루가 잠깐이라도 즐겁다면 억측의 주인공이 되는 일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통증까지 재미있는 건 아니었다. 범인을 잡을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당시 나를 따라다니던 통증은 전부 매트 위를 구르면서 사서 얻은 것들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처음 맛보는 낯선 통증이라서 내심 당황스러웠다. 

통증이라면 다년간 역도와 맨몸운동을 배우면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주짓수로 몸을 혹사하는 건 근력 운동의 그것과는 양상이 다르다. 근육이 찢어짐으로써 발생하는 통증은 비교적 단순하고 명확하다. 움직일 때마다 어떤 근육이 얼마나 찢어졌는지 대번에 알 수 있다. 맨몸운동의 성향만큼이나 정직하고 단순하달까. 하체 운동을 많이 하면 허벅지가 아프고 복근 운동에 집중하면 배가 아프다. 거기에 영원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없을 것 같은 극심한 피로는 덤이다.

귀와 쇄골

반면에 주짓수는 온몸을 조금씩, 천천히 마모시킨다. 특히 눈에 보이지도 않는 관절들이 차츰 닳아서 없어지는 게 선명하게 느껴진다. 뼛속까지 스미는 낯설고 기분 나쁜 통증. 주짓수를 5년 이상 수련한 사람의 움직임을 보면 역설적으로 싸울 의지가 조금도 없는 것처럼 흐느적거리면서 굴러가는데 마치 이가 없는 노인처럼 온몸의 관절이 다 사라져서 그런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그들은 고수이기라도 하지, 나는 이제 막 주짓수에 입문한 주제에 이게 무슨 일인가. 아픈 것도 서러운데 아픈 부위조차 너무 낯설었다. 가장 대표적인 부위가 바로 귀였다. 청력에 이상이 생긴 게 아니라면 도대체 살면서 귀가 아플 일이 뭐냔 말이다. 그런데 정말 어느 날부터인가 부주의하게 옷을 벗거나 젖은 머리카락을 세게 털 때 아주 미세한 통증을 느꼈다.

몇 번의 검색 끝에 이 심각한 건강염려증 환자는 그만 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구글은 계속해서 귀를 다치면 귀의 모양이 흉측하게 변할 거라고 예언했다. 그래플링(Grappling '얽혀서 싸우다'는 뜻으로 레슬링, 유도 등의 격투기를 뜻한다) 선수들이 귀를 다치는 이유는 귀가 머리에서 가장 많이 돌출된 부위이기 때문이다. 보통 상대가 상체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머리로 밀어붙이거나 상대의 몸통 아래 몸이 깔린 상황에서 재빨리 탈출하려고 시도할 때 귓바퀴가 쓸린다. 

이렇게 귀가 상하고 붓도록 내버려 두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흔히 통용되는 속칭 '만두귀'가 되는 건데 이는 몸싸움이 많은 그래플링 종목의 선수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이며 정식 병명은 '이개혈종'이다. 여기서 '이개'는 귓바퀴를 뜻한다. 이 부위는 온통 부드러운 연골로 이뤄지는데 압박과 마찰이 가해지면 연골과 연골막 사이에 피가 고이고 귓바퀴가 부어오른다. 이런 채로 압박과 마찰이 계속 가하면 연골이 두툼해지면서 귀가 변형되는 거다. 

불행하게도 내 몸이 감당해야 했던 부상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내가 거쳐온 부상의 백미는 마치 나무젓가락을 꺾어놓은 모양으로 변형된 오른쪽 쇄골이다. 놀랍게도 쇄골은 한순간 충격을 받아서 부러진 게 아니라 아주 천천히, 조금씩 구부러졌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도 왜 오른쪽 쇄골만 구부러졌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다만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긴 하다. 

한때 나는 양쪽 팔을 상대의 목에 감고 한쪽 팔은 안쪽, 다른 팔은 바깥쪽에 고정한 채로 조르는 '다스 초크(Darce Choke)에 심취했던 적이 있다. 엄살을 받아주던 토마토님처럼 너그러운 상급자들이 이 어린아이의 장난같이 서툰 초크를 허락해줬다. 그때마다 있는 힘을 다해서 목을 조르는데도 '더 세게 하라'는 주문이 돌아왔다. 

"더, 더 세게 해야지!"

그렇게 남의 목을 조르던 힘이 고스란히 내 쇄골에 전해짐으로써 서서히 구부러진 게 아닐까? 귀와 쇄골이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생각할까? 그 생각만 하면 헛웃음이 났다.

진짜 병명
 
▲ 주짓수 공격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병, 그게 우리의 진짜 병명인지도 모른다.
ⓒ 양민영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나는 양쪽 귀에 스와로브스키의 크리스털 귀걸이를 걸고 다녔다. 틈만 나면 사 모았던 스와로브스키 때문에 금속 알레르기와 염증을 달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반짝이는 액세서리를 포기할 수 없어서 피부과에 정기적으로 들러서 처방전을 받아왔다.

또 브이넥 형태로 파인 상의를 입어서 언제나 쇄골이 드러나 있었다. 가끔은 반짝이는 글로우를 쇄골 주위에 바르기도 했고 그런 채로 외출하기 직전에 항상 귀 뒤와 쇄골 위에 향수를 얹었다. 

별안간 모든 꾸밈과 장식이 중단되고 귀걸이도 브이넥도 향수도 사라졌다. 장식을 중단한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귀가 붓고 쇄골이 구부러지도록 싸울 건 뭔가. 이런 극단적인 행태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나조차도 알 길이 없다.

후퇴를 모르던 통증은 다행히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을 만나 멈춰 섰다. 코로나19라는 불청객이 찾아왔고 다른 모든 문처럼 주짓수 도장의 문도 굳게 닫혔다. 그제야 내 몸도 강제 휴식에 돌입했다. 공격, 방어, 도망, 절망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니 몸이 저절로 치유됐다. 세계인을 공황에 빠트린 전염병에 뜻밖의 신세를 진 셈이다.

2년 만에 주짓수와 재회한 뒤로는 만남의 횟수를 제한하며 거리를 두고 있다. 그 덕에 더 이상 귀가 아프지 않고 뼈가 구부러지지도 않는다. 고루하기 짝이 없다고 무시했던 '멀리 가려면 천천히 가라'는 진리를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서야 겨우 체득했다.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는 사람들. 운동광으로 분류되는 나와 친구들은 가끔 이렇게 자조한다. 어쩌면 그게 우리의 진짜 병명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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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게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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