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던 원작 어디로... 레아 세이두 존재감도 소용없었다
[조영준 기자]
▲ 영화 <디셉션> 스틸컷 |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필립 로스(Philip Milton Roth)는 간결하면서도 직관적인 문장으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플롯의 구성으로 큰 울림을 줬던 작가 중 하나였다. 1970년대부터는 거의 매년 한 권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정도로 왕성한 집필을 이어가기도 했는데, 지난 2018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0권이 넘는 저서를 남겼다. 그의 작품은 때로 시대의식을 앞서는 윤리 의식과 성에 대한 시선으로 업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지만, 전미 도서상은 물론 퓰리처상까지 수상하며 평단의 인정을 이끌어냈다.
군더더기 없는 빠르고 힘 있는 플롯의 구성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작품 중 다수는 스크린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1969년 래리 피어스 감독이 연출한 <굿바이 컬럼버스>를 시작으로 <엘레지> <아메리칸 패스토럴> 등의 작품이다. 아쉽게도 모든 작품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들 작품은 모두 원작의 격동적이고 힘 있는 문체를 극장으로 가져오지 못하고 그저 동일한 장면의 답습을 하기 바빴다는 평가만 받았다.
아르노 데스플레생 감독의 신작 <디셉션>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있는 영화다. 필립 로스가 1990년 완성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면서, 원작의 어떤 매력도 제대로 이식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원작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인물들 간의 대화와 심리적 묘사를 그저 영화적 표현으로 프레임 속에 재연하고 있다는 생각만이 강하게 들뿐이다.
02.
영화는 1987년을 배경으로 영국 런던으로 이주한 필립 로스(드니 포달리데스 분)라는 미국 작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극의 대부분은 불행한 결혼 생활 끝에 그를 만나게 된 영국 여인(레아 세이두 분)과의 관계가 이어진다. 정기적으로 그의 작업실을 찾아오는 여인과 함께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고, 성과 여성, 반유대주의와 사회적 이데올로기 등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또 불륜 관계에 놓여있는 각자의 위치를 가늠하고 질투하고 다시 화해하는 동안의 시간들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피난처에서 서로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 영화 <디셉션> 스틸컷 |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아 세이두가 연기하는 영국 여성과의 비밀스런 공간에 해당되는 필립의 작업실은 이 작품에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단순히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고 외부로부터 격리되는 공간이 아니라 필립이라는 인물이 극 중에서 갖는 위치 상의 의미를 표현하고 그가 대화를 이어가는 방향성을 찾아볼 수 있게 만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의 바깥에 놓인 필립의 아내(아눅 그린버그 분)에게는 의심과 미지의 공간이기도 하다.
먼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필립과 관계를 맺고 있는 여성들의 위치를 모두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어느 하나, 누구도 자신이 원하는 공간에 안온한 심리 상태로 놓여있지 않다. 그와 불륜을 저지르기 위해 작업실을 찾는 여자와 체코로부터 추방당한 여성은 물론, 암으로 병실에 누워있는 로잘리(엠마뉴엘 드보스 분)도 마찬가지다. 필립이 교수이던 때에 그와 밀회를 나눈 제자 역시 마음의 병을 얻어 정신병동에 갇혀 있었고 (현재도 정상적인 심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집에 머무르고 있는 아내 역시 그에 대한 의심으로 불안한 심리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극 중에서 자신의 공간에 안정적인 상태로 머물고 있는 것은 필립 단 한 사람뿐이다. (남성으로 확장해서 생각해도 역시 그렇다.)
이를 다시 말하면, 극 중 어떤 인물도 자의적으로 공간과 심리를 선택할 수 없었으나 필립만큼은 두 가지 모두를 선택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비록 영화에서는 그가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이 상대의 의지에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타인의 대화를 경청하며 이를 기록하는 행위에 (자신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 소설로 따지자면 전지적 작가 시점의 위치에서 자신의 곁에 있던 이들을 움직여 온 셈이나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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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영화는 이 지점에서 '극의 요소'라는 또 다른 설정 하나를 갖다 놓으며 필립의 위치를 활용하고자 한다. 필립이 자신의 과거를 통해 제시하는 여성들과의 일화와 자신의 작업실에서 이루어지는 영국 여성과의 밀회를 실제가 아닌 자신의 상상 속에서 펼쳐지는, 소설을 위해 만들어낸 하나의 극 연극이라고 주장하면서부터다. 이는 영화가 제법 진행이 된 이후, 극의 2/3 정도가 넘어가는 지점에서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는 아내로부터 시작되는데, 역시 다른 여성들과의 대화가 기록된 그의 노트가 주요한 역할을 한다. 이 지점까지 극이 이끌어온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분명히 두 남녀의 불륜이 놓여 있고, 모든 관객이 그에 따른 이해를 해왔을 테지만, 어쩐지 한 편으로는 영화가 실제와 허구 사이의 어떤 가느다란 구멍을 지나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 영화 <디셉션> 스틸컷 |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
하지만 이런 여러 가지 장치에도 불구하고 아르노 데플레셍 감독의 <디셉션>은 어느 지점에서도 반짝거리지 못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그 사실을 바라보는 시선이 중요하다고 줄곧 말해 왔던 감독이지만 그조차도 원작의 빛나는 가치들을 스크린으로 제대로 옮겨오는 데는 조금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불륜이라는 소재는 동일한 소재의 다른 활용법들 만큼 충분히 자극적이거나 스릴 넘치게 전달되지 못하고, 이미 연기력이라면 인정을 받을 만큼 받아온 배우들의 존재감 역시 한데 뭉쳐지지 못하고 곳곳에 흩어진 채로 안타까운 여운만 남길뿐이다.
어쩌면 영화의 후반부에서 극적인 반전 혹은 묘한 여운을 남길 법했던 극의 두 가지 용법에 대한 교묘한 간극을 유지하는 일 역시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 그 간극을 유지함으로써 줄 수 있었던, 버젓한 증거 앞에서도 뻔뻔하게 구는 남편으로부터 느끼게 될 아내의 분노와 실제로 존재하며 은밀한 감정을 주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만 여성의 치욕, 그 양면에 대한 '디셉션(기만)'을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의 소설은 완성된다. 이별을 맞이했지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 두 남녀의 관계 역시 또 다른 의미로 완성된다. 정확히 완성되지 못한 것은 단 하나, 이 영화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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