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처럼 등장한 형제 감독, '교훈적 코미디'의 진수
[양형석 기자]
지난 2018년에 개봉한 비고 모텐슨 주연의 영화 <그린북>은 이듬 해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휩쓸었다. 당시 경쟁작이 스파이크 리 감독의 <블랙클랜스맨>,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보헤미안 랩소디>, 브래들리 쿠퍼 감독의 <스타 이즈 본> 등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린북>의 작품상 수상은 이변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린북>을 연출한 감독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코미디 전문 감독으로 유명했던 피터 페럴리였다.
피터 페럴리 감독은 동생 바비 페럴리와 함께 지난 1994년 짐 캐리와 제프 다니엘스 주연의 코미디 영화 <덤 앤 더머>를 공동 연출하면서 혜성처럼 등장했던 형제 감독이다. 패럴리 형제는 예술영화 감독으로 명성을 떨치던 코엔 형제와 달리 철저하게 웃음을 쫓는 가벼운 코미디 영화를 전문으로 만들었다. 특히 카메론 디아즈 주연의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패럴리 형제의 장난기가 응축된 코미디 영화였다.
▲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는 무명배우였던 잭 블랙의 배우인생에 전환점이 됐던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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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위해 특수분장 감행한 기네스 팰트로
영화 제작자 아버지와 배우활동을 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팰트로는 어린 시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대부로 두며 배우의 꿈을 키웠고 어머니와 같은 연극무대에 서기도 했다. 1995년 데이빗 핀처 감독의 범죄 스릴러 영화 <세븐>을 통해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팰트로는 <엠마>와 <위대한 유산>, <슬라이딩 도어즈> 등에서 차례로 주연을 맡으며 관객들에게 익숙한 배우로 성장했다.
팰트로는 1998년 존 매든 감독의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 출연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전성기를 활짝 열었다. 다만 당시 팰트로의 경쟁상대가 <원 트루 씽>의 메릴 스트립, <힐러리와 재키>의 에밀리 왓슨, <엘리자베스>의 케이트 블란쳇이었기 때문에 팰트로의 아카데미 수상은 이변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팰트로 역시 "내가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겸손한 수상소감을 남겼다.
아카데미 수상 이후 인지도가 더욱 올라간 팰트로가 2001년에 선택한 작품은 의외로 패럴리 형제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였다. 팰트로가 4시간에 달하는 특수분장을 하며 열연을 펼친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는 4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 세계적으로 1억41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남겼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하지만 팰트로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이후 연기로나 흥행으로나 인상적인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2008년 팰트로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의 비서에서 연인으로 발전하는 페퍼 포츠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그저 히어로 영화 속 주인공의 애인 역할이었지만 팰트로가 연기했기에 페퍼 포츠 캐릭터가 더욱 빛날 수 있었다. 팰트로는 7편의 마블 영화에서 페퍼 포츠를 연기했고 < 아이언맨3 >와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는 화려한 액션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지난 2008년 라이프스타일 컴퍼니를 설립한 팰트로는 지난 2016년 사업에 전념하고 싶다는 이유로 돌연 연기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실제로 팰트로는 사실상 카메오 출연에 가까웠던 <스파이더맨: 홈커밍>과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인피니티 사가의 대미를 장식했던 <어벤져스: 엔드게임>까지만 출연했고 이후 공식적인 연기활동을 하지 않은 채 사업가이자 유명인으로의 삶에 전념하고 있다.
▲ 영화 속에서 로즈마리(왼쪽)는 할의 눈에 마냥 예쁘고 날씬하게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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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코미디 배우가 됐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잭 블랙은 조·단역을 전전하던 무명배우에 가까웠다. 그런 잭 블랙에게 2001년 패럴리 형제 감독의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고 잭 블랙은 이 기회를 멋지게 잡았다. 만약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가 없었다면 2003년 <스쿨 오브 락>, 2005년 <킹콩>, 2008년<쿵푸 팬더>로 이어지는 잭 블랙의 성공스토리는 쓰여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패럴리 형제 감독의 1998년작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2300만 달러의 제작비로 3억69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성적을 올린 바 있다. 하지만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역시 제작비의 3배가 넘는 흥행수익을 남기며 패럴리 형제의 건재를 알린 작품이었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는 국내에서도 2002년 2월에 개봉해 가벼운 '데이트 무비'로 사랑 받으며 서울에서만 22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물론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는 기본적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지만 각본작업에도 참여한 패럴리 형제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를 통해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도 담았다. 특히 로즈마리(기네스 팰트로 분)와 함께 방문했던 아동병원에서 만난 아이가 할(잭 블랙 분)이 다시 병원에 방문했을 때아이의 얼굴에 화상을 입은 사실을 발견하는 장면은 관객들을 숙연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한국에서도 영화 <미녀는 괴로워>의 김아중이나 드라마 <드림하이>의 아이유가 뚱뚱한 여성을 연기하기 위해 특수분장을 받은 바 있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의 기네스 팰트로 역시 로즈마리 역을 소화하기 위해 4시간에 걸쳐 온 몸에 라텍스를 바르는 특수분장을 감행했다. 팰트로는 분장을 마치고 일부러 사람이 많은 장소로 나가곤 했는데 그 때마다 사람들은 할리우드 유명 배우인 그녀를 알아보긴커녕 그녀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고 한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의 원제는 '얄팍한 할'이라는 뜻을 가진 < Shallow Hal >로 국내로 수입되면서 제목이 변경됐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의 센스 있는 제목이 화제가 되고 흥행성적도 좋게 나오면서 2004년작 <내겐 너무 아찔한 그녀>(원제: <The Girl Next Door>), 2008년작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원제: <Lars And The Real Girl>)처럼 비슷한 작법으로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의 제목을 변경하는 게 한 동안 유행했다.
▲ 유명 강사 겸 작가,심리학자인 토니 로빈슨은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 출연해 할에게 사랑의 최면을 걸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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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리의 아버지이자 할이 다니는 회사의 오너 스티브 샤나한은 딸을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두 살 이후로 딸을 무릎에 앉혀 본 적이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이 때문에 집에 방문한 할이 로즈마리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도 여느 남자들처럼 할 역시 자신의 재산을 노린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스티브는 로즈마리를 따라 함께 봉사활동을 가겠다고 고백하는 할의 진심을 알았고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해준다.
로즈마리의 아버지 스티브를 연기한 고 조 비터렐리는 90년대 중반까지 톰 크루즈 주연의 <야망의 함정>과 배우 숀 펜이 연출한 <크로싱 가드>, 아놀드 슈왈제네거 주연의 <이레이저> 등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비터렐리는 2002년 로버트 드니로와 빌리 크리스탈 주연의 코미디 영화 <애널라이즈 댓>을 유작으로 남긴 채 지난 2004년 세상을 떠났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는 아버지의 유언 때문에 여자 보는 눈이 하늘만큼 높아진 할을 치료해주는 구세주가 등장한다. 바로 할의 회사에 강연을 온 자기계발 강연가이자 작가인 토니 로빈스였다. 할의 고민을 들어주던 토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를 만날 수 있는 주문을 걸어 주겠다며 할의 머리에 손을 대고 "악마야, 썩 나와라!"라고 외친다. 그리고 실제로 할은 여성의 외모가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며 로즈마리를 만났다.
토니 로빈스는 실제 작가와 심리학자, 강연가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 인물로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 카메오라고 하기엔 제법 비중이 높은 조연으로 출연했다. 세계적인 동기부여 전문가로 여러 편의 자기 계발서를 집필한 로빈스는 경제 분야에도 조애가 깊어 투자 관련서적을 쓰기도 했다. 특히 그의 저서 중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던 <돈의 본능>은 국내에도 번역돼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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