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12년, 농촌 사람들이 내게 불친절한 이유를 알았다

전정희 2022. 10. 26.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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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웰빙팜] 농사꾼 임송의 귀농일기(11)
뭐든 직접 DIY, 개집 크게 지으면 창고..뭐가 어려운가?

2010년 4월에 지리산으로 왔으니 만 12년이 넘었다. 내 50대를 고스란히 여기서 보낸 셈이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계속 했더라면 정년을 앞두고 내 앞가림 하랴 후배들 눈치 보랴 고달팠을 것 같다. 집에서는 아이들 공부시키고 취업할 때까지 뒷바라지 하느라 쪼들렸을 것이고 준비 안 된 상태로 퇴직하려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을 것 같다.
평소에는 잘 몰랐는데 사진 찍어 보니 손이 제법 거칠어졌다. 사진=임송

농촌에서의 10여년의 세월은 어땠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하는 고민과 무관하게 지냈을까? 그렇지 않다. 직장은 일찌감치 그만뒀으니 더 말할 것이 없고. 아이들 뒷바라지야 서울에 있으나 여기 있으나 부모노릇은 해야 하고 여기서 생활한다고 노후를 위해 특별히 더 준비한 것도 없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사는 동안 몸서리치게 행복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 인생에서 농촌으로 이주하여 산 10여년의 세월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도시에 살았을 경우를 가정해 비교하자면 손이 좀 거칠어졌고 경험의 범위가 다소 넓어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듯하다.

나는 손이 평균 이하로 작은 편이다. 손이 작으니 당연히 손아귀 힘도 약했다. 일을 해 본 사람을 알겠지만 손아귀 힘이 약하면 일할 때 불편하다. 망치질 할 때도 무거운 물건 옮길 때도 무슨 꼭지나 나사 같은 것 돌리는 것도 주로 손가락이나 손아귀 힘을 사용하기 때문에 손이 작으면 힘을 잘 못쓴다. 여기 내려오기 전까지 내 손가락은 가늘고 야리야리한 전형적인 샌님 손가락 이었다.

그런데 여기 내려와 생활하는 동안 손이 제법 두꺼워지고 손아귀 힘도 세 졌다. 아무래도 몸으로 하는 일을 많이 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됐다.

서울에 살 때는 집에 수도 배관이나 전기 등이 고장 나면 대부분 기술자를 불러서 돈 주고 해결했다. 하지만 농촌에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경우가 많다. 사는 곳이 외진 곳이라 근처에 기술자가 없는 경우도 많고 멀리서 사람을 부르려면 비싸서 쉽게 부르지도 못한다. 그러니 문제가 생기면 어쩔 수 없이 끙끙대며 혼자 이리저리 살펴보게 된다. 다행이 요즈음은 유튜브에 집에서 생기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 방법이 많이 올려 져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
최근에 설치한 지하수 정수기. 하우징, 필터, 감압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부품 구입비용으로 약 20만원 정도 들었다. 정수기 설치 후 물 맛이 좋아졌다. 사진=임송

최근에는 화장실에 정화조 냄새가 올라오기에 화장실 변기를 뜯었다가 다시 앉혔다. 지하수가 탁하기에 정수기 부품을 사다가 직접 조립해서 정수시설을 설치했다. 집안에 물을 돌려주는 모터가 고장 나서 부품 몇 가지 사다가 직접 수리했다. 대차 등 공장에서 사용하는 소소한 비품들은 앵글을 사다가 직접 조립해서 사용한다. 이런 일들이 유튜브에 올려 진 자료들을 참조하여 최근에 내가 직접 했던 일들이다.

사실 내가 지금 말한 것들은 유튜브를 참조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엄두가 나지 않아 시작을 못할 뿐이다. 수강료 낸다 생각하고 부품 사다가 과감하게 덤벼들어 하다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하나 둘씩 하다보면 점점 실력이 는다. 개집을 지으라고 하면 누구나 쉽게 덤벼드는데 창고를 지으라고 하면 멈칫거린다. 개집을 조금 크게 지은 것이 창고인데도 말이다.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본래적 의미의 ‘일’이 아닌가. 그런데 사회가 분업화되고 복잡해지다 보니 사람들이 ‘일’을 직접 하지 않고 ‘돈’을 벌어 일하는 사람을 산다. 그러다 보니 일하는 능력을 점차 상실하게 됐고.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감의 바탕에 일하는 능력의 상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간단한 집안 일 하나 해결해도 만족감이 큰 것은 어쩌면 그동안 상실했던 ‘일하는 능력’이 회복된 것 같은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농촌에 내려와 사는 동안 도시에 살 때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겪었다. 그중에 하나가 주변 사람들의 ‘불친절’이다.

물론 도시에 살 때도 친절하지 않은 사람들은 더러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겉으로라도 친절했다. 그런데 농촌에 내려오니 친절한 사람보다 오히려 불친절한 사람이 더 많다. 누가 나에게 불친절하면 처음에는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불친절하다고 딱히 뭐라고 할 수도 없어서 그냥 지내다 보니 이제는 오히려 익숙해졌다.
지리산으로 오던 해에 후배가 준 나무로 만든 테이블. 깨끗한 나무였는데 그동안 흠집이 많이 생겼다. 사진=임송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나에게 불친절한 이유가 내 옷차림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매일 작업복만 입고 다니니 사람들이 나를 쉽게 봐서 그런 것 같다. 가끔 일이 있어 양복을 입고 나가면 불친절이 훨씬 덜한 것을 보면 그게 사실인 것 같기도 하다. 한 번은 평소 내 앞에서 우쭐거리던 농협 직원이 양복 입은 나를 보고 얼떨결에 깍듯하게 인사하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지금 글을 쓰다 보니 시청 공무원 한 사람도 그렇게 인사하던 기억이 난다.

요즘은 이 근방에서는 낯이 익어서 그런지 나에게 불친절한 경우가 훨씬 줄어들기는 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 옷차림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거나 잘 아는 사람과 낯 선 사람을 차별적으로 대하는 것은 여기 사람들 뿐만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항상 그래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여기 사람들이 나에게 불친절 했던 것은 특별한 일도 아니다. 내가 외지에서 온 사람이고 내 옷차림이 작업복이었으니까. 그동안 내 옷차림 바뀐 생각은 못하고 괜히 여기 사람들이 불친절하다고 타박만 했다. 앞으로는 누가 나에게 불친절하면 내 옷차림이나 내 처지를 먼저 돌아봐야겠다.

아무튼 지난 10여 년간 낯 선 곳에 와서 낯 선 사람들과 어울리며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일을 벌여왔다. 어찌 그 시간들이 그리 호락호락 할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큰 사고 없이 건강하게 지낸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경험의 범위가 다소 넓어진 것은 덤이고.

◇ 임송
중앙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펜(Upenn)대학 대학원에서 사회정책학을 공부했다. 1989~2008년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공직 생활을 했다. 부이사관으로 퇴직 후 일용직 목수를 거쳐 2010년 지리산(전북 남원시 아영면 갈계리)으로 귀농해 농사를 짓다가 최근 동네에 농산물 가공회사 '웰빙팜'을 설립했다. 

jirisanproduc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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