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라·보우소나루로 갈라진 브라질, 누가 되든 혼란 부른다 [글로벌포커스]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남미 경제대국 브라질의 대선 결선 투표가 5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대선 결선은 당초 전망과 달리 박빙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 2일(현지시간) 1차 투표에서 예상(30%대 후반)보다 높은 43.2% 득표율을 기록한 자이르 보우소나루 현 대통령의 상승세가 이어지고 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1차 투표 1위를 기록한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1차 48.4%)과의 격차를 오차범위 내로 한껏 좁혔다. 그래도 여전히 현지에서는 조심스럽게 룰라 전 대통령의 승리를 점치고 있다.
대선 결과 극심한 분열이 나타남에 따라 선거 이후에는 정치적 혼란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존경한다는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전자투표 조작 가능성을 제기하며 여러 차례 대선 패배 시 불복 가능성을 시사했다. 여전한 코로나19,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해 경제적 상황도 녹록지 않아 차기 정부에 부담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탄주의" vs "제노사이드"
브라질 최고선거재판소(TSE)는 결선투표 48시간 전부터 모든 온라인 정치 광고를 중단시키기로 결정했다. 선거 결과가 박빙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양 측의 비방전이 도를 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룰라 전 대통령을 ‘악마’ ‘사탄주의’라는 원색적인 용어로 공격하고 있다. 룰라 전 대통령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자신은 악마와 거래를 한 적도 없고,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고 성명을 내기까지 했다.
룰라 측도 원색적인 비방전으로 맞대응하고 있다. 보우소나루 정부의 잘못된 방역 정책으로 브라질 국민 78만명이 코로나19로 목숨을 잃은 사실을 꼬집으며 ‘제노사이드(Genocide·대량학살)’라는 표현으로 공격했다. 보우소나루는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거부해 방역 대책에 어려움을 초래했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면 에이즈에 걸릴 위험이 커진다는 주장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극단적인 사고도 발생하고 있다. 지난 9일 마투그로수(Mato Grosso)주에서는 보우소나루 지지자인 20대 청년이 룰라를 지지하는 40대를 칼로 찔러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2018년 대선 유세 중 괴한이 휘두른 흉기에 복부를 찔리기도 했다. 룰라와 보우소나루 모두 공식석상에서 방탄조끼를 착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지율 격차가 좁혀지면서 비방전은 더 가열되고 있다. 브라질 여론조사업체 다탸폴라가 지난 19일 공개한 여론조사에서는 지지율 격차가 4%포인트에 불과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브라질 결선투표를 ‘두 브라질의 충돌(A clash of two Brazils)’로 표현하며 브라질 대선이 지독한 분열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고 지적했다.
브라질 여론조사업체 퀘스트의 펠리페 누네스 대표는 "브라질은 완전한 분열을 겪고 있다"며 "이번 선거는 단순히 두 후보 간의 대결이 아니라 브라질 역사에 없었던 두 세계관 사이의 충돌"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가난한 자와 흑인, 여성, 가톨릭 신자들은 룰라를, 부자와 백인, 남성,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들은 보우소나루를 지지한다고 설명했다.
누네스 대표는 "룰라의 세 번째 임기를 두려워하는 유권자 수가 보우소나루의 재선을 두려워하는 유권자 수보다 조금 적다"며 룰라가 근소한 우위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대선 불복·경제난’으로 혼란 이어질 듯
선거 뒤 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우소나루는 대선 결과가 자신의 패배로 나올 경우 불복하겠다는 의사를 여러 차례 드러내며 트럼프 같은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오직 신만이 자신을 해임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세계 경제가 침체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점도 차기 정부에 악재다. 이코노미스트는 20일 브라질의 차기 대통령은 크고 복잡한 과제들에 직면할 것이라며 브라질 경제가 길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표면적으로 브라질의 현재 경제 상황은 나쁘지 않다. 올해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의 강력한 긴축 조치로 주요 통화가 모두 달러에 약세를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달러 대비 브라질 헤알화는 되레 8% 이상 올랐다. 상파울루 증권거래소의 보베스파 지수도 올해 14% 넘게 올랐다. 브라질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4월 12.1%로 정점을 찍은 뒤 하락세를 보이며 9월에는 7.2%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룰라 전 대통령 재임 시절 세계 6위까지 올랐던 브라질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현재 12위로 떨어졌다. 이코노미스트는 상파울루 외곽의 메르세데스 벤츠 공장이 7400명 인력 중 절반을 줄일 계획이고 앞서 포드, 도요타 등도 브라질 공장을 정리했다며 브라질의 제조업 위축을 지적했다.
1993년 GDP에서 26%를 차지했던 제조업 비중은 2004년 15%로 줄었고 지금 간신히 10%선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신 농업 비중이 28%에 달한다. 브라질의 연평균 농업 생산성 증가율은 3%지만 제조업 생산성 증가율은 0%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0년간 브라질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0.3%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유엔은 지난 8월 기아현황지도(Hunger Map)를 공개하면서 브라질을 8년 만에 다시 기아 위기국에 포함시켰다. 유엔은 인구의 2.5% 이상이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직면한 국가를 기아 지도에 포함시킨다. 브라질의 만성 기아 비율은 현재 4.1%에 달한다.
12년 만에 대통령직 복귀를 노리는 룰라는 과거 자신의 재임 때 풍요로웠던 시절을 떠올리라고 유권자에게 호소한다. 2003~2010년 룰라의 재임 기간 브라질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4%를 넘었다. 실업률도 절반으로 줄고 물가 상승률과 공공부채도 줄었다. 하지만 룰라 재임 당시에는 원자재 시장이 호황이었고 미국도 기준금리를 낮추며 경기 부양에 힘을 쏟을 때였다. 지금은 미국이 긴축에 나서며 완전히 다른 환경인 만큼 룰라가 다시 집권해도 2000년대 초 집권 당시의 호황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분석이 나온다.
룰라 당선되면 ‘제2의 핑크 타이드’ 완성
같은 이유로 제2의 핑크 타이드도 과거와 같은 위세를 떨치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다. 핑크 타이드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남미 국가에서 잇달아 온건 사회주의 성향의 좌파 정부가 정권을 잡았던 흐름을 뜻한다. 남미 좌파 정부는 퇴조했다가 지난 몇 년 새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 콜롬비아 등에서 잇달아 좌파 정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제2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룰라가 당선되면 남미 주요 6개국 정부가 모두 좌파 정부가 돼 제2의 핑크 타이드의 완성을 뜻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과 지정학적 불안이 겹치며 정부 재정지출 여력이 없어 과거처럼 좌파 정부가 인기를 끌기가 어렵고 따라서 제2의 핑크 타이드는 1차 때보다 단명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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