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일 "일본 30~40대 정치인은 한국 동경..60대와 다르다"
한·일 정상 결심하면 일주일 만에 갈등 풀려
강창일(70) 전 주일대사(2021년 1월~2022년 7월)가 일본 부임 당시 겪었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역대 주일대사치고 평탄했던 적이 거의 없지만, 강 전 대사는 특히 격동의 시간을 보냈다. 지난해 1월 나리타 공항에 도착할 때부터 갈등 현안에 대한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한·일 관계가 최악의 시기에 접어들었을 때 부임하면서다. 하지만 그는 많은 기록을 세웠다.
도쿄 황궁에 신임장을 받으러 가서 나루히토(德仁) 일왕과 35분간 독대를 했다. 이례적으로 긴 시간이다. 강 전 대사는 “침대에서 떨어져 한 달간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신임장 제정이 늦어졌지만, 대화 분위기가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나루히토 일왕이 평화주의자라고 알려졌는데 인상이 매우 온화했다”며 “대화 내내 ‘한·일 우호 증진을 위해 강 대사가 힘써달라’고 거듭 강조했다”고 회고했다.
강 전 대사는 국사학을 전공한 첫 주일대사라는 기록과 함께 도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주일대사라는 기록도 남기게 됐다. 30여년 전 박사학위 논문의 연구자료를 보완해 『근대일본의 조선 침략과 대(大)아시아주의』를 일본어로 출판했다. 30년 넘게 파고든 주제여서 편집은 진작에 마쳤지만, 대사 재임 중에는 업무에 매달리느라 귀임한 뒤에야 출판했다. 동국대 석좌교수로 부임한 그를 지난 20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일 관계가 어려울 때 부임했다.
“2021년 1월 22일 일본에 갔다. 앞서 1월 8일 위안부(피해자 12명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는) 재판 결과가 나온 직후였다. 그때부터 일본과의 파이프(긴밀한 대화 통로)가 완전히 끊겼다. 외무성과 총리관저의 강경파들이 당분간 한국대사를 만나지 말라고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에게 이야기를 해뒀다고 들었다. 한국에 잘못된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곤란한 상황을 어떻게 돌파했나.
“현직 관료들이 슬슬 피하길래 일본 정계의 전직 실세들을 만났다. 일본에 재임하는 동안 대사 관저로 초청해 밥 먹은 일본 국회의원만 해도 200명이 넘는다. 전직 총리는 아베 신조만 빼놓고 다 만났다.”
-일본 정부와는 어떻게 대화 물꼬를 텄나.
“지난해 8월 도쿄올림픽이 계기가 됐다. 5월쯤 되니까 총리관저의 분위기가 조금 바뀌기 시작했다. 아예 더 나아가 청와대와 직접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대화 통로를 열어달라고 했다. 그때부터 일본 측과 열심히 해서 대화가 복원되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스가 총리가 만나는 계획도 다 돼 있었다. 막판에 불발된 건 안타깝다.”
-일본 경제가 크게 침하하고 있다.
“한·일 관계 개선의 구조적인 문제로 볼 수 있다. 과거 한·일 경제 격차가 컸을 때 정치를 했던 80대 정치인들은 한국을 대할 때 여유가 있다. 하지만 지금 일본 정치의 주역인 60대는 위기감과 경쟁의식이 크다. 여유가 없다. 30대·40대는 한국을 동경한다. 젊은 국회의원들은 한국 의원들과 교류하고 싶어한다.”
-일본의 위기감이 적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은 IT 기술혁명의 전환기에 잘 적응했고 일본은 실패했다. 일본에 살아보니 병원은 물론 사회보장에서도 한국이 앞서 있다. 일본이 놀랄 정도로 한국이 너무 커 버렸다. 그 결과 갈등과 충돌이 구조화되고 있다. 잃어버린 10년이 20년을 넘어 30년이 되고, 일본은 한국에 뒤진다는 조바심이 있는 것 같다.”
-이제는 갈등을 풀어야 하지 않겠나.
“지금은 양국 정상이 결단만 하면 된다. 한국 외교부와 일본 외무성의 대화는 정상적으로 되고 있다. 강제징용 배상은 한국 정부가 대위변제하고 일본 기업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게 상책이다. 일본 정부는 일본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모른 척하면 된다. 위안부화해재단은 일본이 기금을 내놓았으니 한국 정부가 기금을 오히려 더 보태어서 재단을 다시 복구하면 된다. 2015년 위안부 화해에 관한 합의 자체는 문재인 정부에서도 존중한다고 했다.”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뉴욕 만남을 놓고 뒷말이 많다.
“양측 모두 안타깝다. 윤 대통령이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지나다가 커피 한잔했다고 하면 될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공식회담이냐 간담회냐 그게 중요하지 않다. 청와대에서도 만남을 서둘러 발표한 것도 성급했고, 일본 측도 무례했다. 만남의 의미를 굳이 우리가 구질구질하게 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일본이 왜 그리 쪼잔해졌나.“
-한·일 관계 정상화는 미루지 말아야 한다.
“정치인들이 정쟁으로 이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죽창가 같은 게 무슨 도움이 되나. 최근에는 ‘극단적인 친일행위’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런 말 자체가 극단적이다. 서로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 한·일 양국이 미래지향적으로 협력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양국 정부가 의지만 있으면 한·일 문제는 일주일이면 풀린다.”
김동호 논설위원 kim.dong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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