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태와 레고랜드는 어떻게 금융시장을 흔들었나[송승섭의 금융라이트]
보증섰는데..김진태 강원지사 "회생 돌입"
불안심리 커진 투자자들 지갑 닫기 시작해
우량기업 회사채도 유찰, 채권금리는 폭등
정부 "유동성 50조 넘게 공급" 진화 안간힘
금융은 어렵습니다. 알쏭달쏭한 용어와 복잡한 뒷이야기들이 마구 얽혀있습니다. 하나의 단어를 알기 위해 수십개의 개념을 익혀야 할 때도 있죠. 그런데도 금융은 중요합니다. 자금 운용의 철학을 이해하고, 돈의 흐름을 꾸준히 따라가려면 금융 상식이 밑바탕에 깔려있어야 합니다. 이에 아시아경제가 매주 하나씩 금융이슈를 선정해 아주 쉬운 말로 풀어 전달합니다. 금융을 전혀 몰라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가벼운’ 이야기로 금융에 환한 ‘불’을 켜드립니다.
[아시아경제 송승섭 기자] 국내 금융시장이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채권 투자자들이 지갑을 닫아버렸고 우량기업들도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죠. 채권금리는 크게 치솟았고요. 사태의 시작에는 레고랜드 부도사태와 김진태 강원도지사의 발언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레고랜드 자금마련에 쓴 'ABCP'?
발단은 2년 전으로 올라갑니다. 레고랜드에서 상수도와 일대 도로 개발을 담당하던 중도개발공사(GJC)는 테파마크 조성을 위해 돈을 빌리기로 합니다. 대규모 부동산 개발사업이었던 만큼 큰돈이 필요했던 거죠. 이에 2020년 자금조달을 위한 특수목적회사(SPC) ‘아이원제일차’를 세우고 2050억원의 어음을 발행하죠. 원활한 판매를 위해 강원도가 보증을 섰고 BNK투자증권이 주관사를 맡아 모두 인수한 뒤 다른 회사에 팔았습니다. 증권사 10곳과 자산운용사 1곳이 사들였죠.
상품 이름은 ‘자산담보기업어음(Asset-backed Commercial Paper·ABCP)’입니다. 말 그대로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잡고 발행하는 어음이죠. 입장료처럼 회사가 앞으로 벌어들일 권리(매출채권)나 기업이 가진 땅·건물 등 다양한 자산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식입니다. 아이원제일차가 담보로 내세운 건 ‘대출채권’이었습니다. GJC가 아이원제일차에서 먼저 2050억원을 빌린 뒤, 아이원제일차가 ‘GJC에서 돈 받아낼 권리’를 바탕으로 ABCP를 발행하는 구조였죠. 만기는 지난달 29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건설자금 마련을 목적으로 돈을 빌려갔던 GJC가 계약과 달리 어음상환에 실패합니다. 투자자들은 보증을 섰던 강원도로 눈을 돌렸죠. 대신 돈을 갚아주기로 약속했었으니까요. 하지만 지난 7월 취임한 김진태 강원도지사는 “법원에 GJC의 회생신청을 하겠다”고 발표해버립니다. 예산을 마련해 돈을 갚는 대신 법원이 정하는 법정관리인이 GJC의 자산을 팔고 그 돈으로 상환을 하겠다는 뜻이었죠.
국가가 보증한 어음도 못 믿겠다…투자자 불안감↑
투자자들은 김진태 도지사의 발언을 위험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김 도지사가 ‘돈을 안 갚겠다는 뜻이 아니다’라는 취지를 누누이 밝혔지만 투자자들의 생각은 달랐죠. 앞으로 채권에 투자한 뒤 돈을 제대로 돌려받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회생절차에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GJC가 보유한 자산을 제값에 팔아 빚을 모두 갚을 수 있는지도 불확실했고요. 수년에 걸쳐 일정 금액을 갚는다 해도 투자자 입장에서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거기다 ‘지방자치단체의 보증실패’가 주는 충격도 컸습니다. 투자자들은 강원도가 보증을 선만큼 ABCP가 매우 안전한 상품이라고 여겼습니다.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상 돈 떼일 걱정은 없다고 판단했죠. 사업성 논란이 있었음에도 신용평가사들은 최고에 해당하는 ‘A1’ 등급을 매겼고요. 그런 상품이 사실상의 지급불능 상태가 됐으니 투자자들은 그야말로 패닉에 빠졌습니다.
결국 신용평가사들도 ABCP의 신용등급 조정에 나섰습니다. ‘상환능력이 있는지 모를 정도로 위험한 단계’에 해당하는 C등급으로 하향됐죠. 결국 이달 초 ABCP와 아이원제일차는 부도처리 됐습니다. 지자체가 보증한 ABCP가 지급불능이 된 건 처음 있는 일입니다.
여파는 국내 금융시장 전반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투자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생각이 퍼진 겁니다. 망할 일이 없는 지자체가 보증을 서도 돈을 제대로 못 돌려받는데, 민간기업에서 발행하는 채권과 어음은 오죽하겠냐는 거죠. 투자자들은 지갑을 닫았습니다. 미국의 긴축재정과 기준금리 인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악재가 가득한 금융시장의 불안감에 불을 지른 겁니다.
우량기업 회사채 유찰, 채권금리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기업들이 피해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17일 한국전력공사가 연 5.75%와 연 5.9% 금리로 4000억원의 회사채 발행을 시도했지만 1200억원이 유찰됐습니다. 기업 신용이 AAA로 최고등급에 해당하는 기업인데도 채권 투자자들이 구매하지 않은 겁니다. 한국도로공사(AAA등급)이 발행한 채권 1000억원은 아예 전액 유찰됐고요. 최고 신용등급의 우량기업 채권도 이러니 규모가 작고 신용등급이 낮은 기업은 자금조달이 매우 어려운 실정입니다.
기업들은 자금 조달을 위해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채권금리를 높게 책정해서 이자를 더 많이 줘야만 돈을 빌릴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21일 기준 회사채 3년물(무보증) AA-등급의 금리는 5.736%입니다. 전날의 연중 최고치 기록 5.588%를 하루 만에 깼습니다. 회사채 3년물(무보증) BBB- 등급금리도 11.585%로 연중 최고점을 다시 경신했고요. 기업어음(CP)과 자산담보부단기채(ABSTB) 차환 금리가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를 찍었죠.
특히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의 자금경색이 심각합니다. PF는 대규모 건설·부동산 프로젝트에 쓰이는 대출기법입니다. 담보 대신 사업의 프로젝트만 따진 뒤 돈을 빌려주는 상품입니다. 강원도가 ABCP의 보증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다른 PF 상품은 아무리 높은 이자를 책정해도 팔리지 않는 현상이 나타난 겁니다. 올 연말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PF 유동화증권은 약 34조원에 달합니다. 투자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돈을 빌려주고 보증을 선 증권사와 건설사 등이 큰 손실을 입거나 부실 위기에 처할 수도 있죠.
김진태 해명에도 불안감 여전…정부 "유동성 50조 넘게 공급"
문제가 심각해지자 김 도지사는 기자회견을 열어 입장을 밝혔습니다. 김 도지사는 지난 21일 “강원도는 누차 말씀드렸던 것처럼 중도개발공사 변제 불능으로 인한 보증 채무를 반드시 이행하겠다”면서 “늦어도 2023년 1월 29일까지 이행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올해 안에 보증 채무 이행을 위한 지급금 2050억원의 예산안 편성을 추진하고 있다”며 “채권시장의 개별 투자자들을 보호하고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라고 언급했죠.
그럼에도 투자자들의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날 정부가 나서기로 했습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은 서울 은행회관에서 비상 거시경제금융회의를 열었습니다. 유동성 공급 프로그램을 50조원 넘게 확대운용하기로 한 거죠. 산업은행·기업은행·신용보증기금이 운영하는 회사채·기업어음(CP) 매입 프로그램 매입한도는 16조원으로 올렸고, 유동성이 부족해진 증권사에는 3조원 규모지원을 단행합니다.
추 부총리는 “부동산 PF 시장 불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면서 “모든 지자체가 매입 보증을 확약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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