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만엽집' 대가 "일본은 아름다운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

김정연 2022. 10. 1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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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엽집(萬葉集)』 연구 일인자
나카니시 스스무
일본의 고대 시 장르인 『만엽집』 연구 일인자인 나카니시 스스무 일본 고시국문학관장은 "『만엽집』은 백제인에게서 유래됐다"는 설을 처음으로 제기한 학자이기도 하다. 일본 내 다수 문학상을 받은 그는 첫 해외 수상을 위해 한국을 찾아 지난 8일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다. 김정연 기자


일본 전통 시가가 백제에서 온 것이라 주장하는 일본 전통문학 연구 일인자가 지난 8일 열린 창원 KC 국제문학상 시상식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평생을 몰두한 『만엽집(萬葉集)』 연구 성과를 높게 인정받아 이 상을 받은 나카니시 스스무(中西 進·93) 일본 고시 국문학관장이다.


일본 보통 사람들의 시 『만엽집』, 백제 영향으로 생겨났다?


『만엽집』은 '만 개의 잎을 모은 책'이라는 뜻으로, 고대 일본 대중에 널리 알려진 4536개 시와 노래를 모은 시가집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문학 장르로 꼽히며, 고대 일본인의 생활상과 생각을 담고 있어 문학적·생활사적·사상사적 가치도 높은 자료로 평가된다.

시상식을 앞두고 서울에서 만난 나카니시 관장은 "전통적으로 일왕이 고른 시를 모은 칙선 와카집(勅撰和歌集·시집)도 있지만,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부르던 시에 매혹돼 『만엽집』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만엽집』을 시간이 흐르며 추려진, '역사가 고른 시'라고 표현한 그는 일본 문학계에서 『만엽집』 연구 일인자로 꼽힌다.

일본과 중국 등 문학 비교 연구가 주 전공이었던 나카니시 관장은 『만엽집』이 한반도에서 넘어간 백제인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장르라는 설을 처음 제기한 학자이기도 하다. 1980년대에 『만엽집』3대 가인 중 한 명인 야마노 우에노 오쿠라(660~738)가 백제인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해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유명 가인 '오쿠라'는 백제 성 '옥'씨, 만엽집 만든건 외래 문화 에너지"


일본 정서의 뿌리로도 불리는 『만엽집』은 2019년 새 일왕 즉위와 함께 새 시대 이름을 정한 토대가 되기도 했다. '레이와'는 '명령 령'에 '화합할 화'를 붙인 단어로, 만엽집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나카니시는 뜻풀이는 영어로 '아름다운 조화(bearutiful harmony)'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김정연 기자

그는 "백제에 흔한 성씨인 '옥'에, 한국식으로 'OO아~' 부를 때 뒤에 붙는 '아'가 '라'로 변형돼 붙으면서 '오쿠라'로 알려진 것"이라며 "한반도에서 벌어진 백촌강 전투(663년) 이후 많은 백제 지식인들이 일본으로 건너오면서, 일본 문화가 갑자기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시기가 왔다"고 설명했다. '백제 도래인설' 제기 이후『만엽집』에 실린 시와 신라 향가의 유사성을 밝힌 연구 결과도 발표한 그는 "『만엽집』을 만든 건 외래 문화의 에너지"라고 덧붙였다.

그의 주장에 일본 역사학계에선 사소한 부분을 트집 잡아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고, 일본 문학계는 그냥 무시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외롭지 않았냐고 묻자 나카니시 관장은 "학자는 언제나 고독한 것, 고독하지 않으면 훌륭한 학설이 아니다"라며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고 답했다.


일본 새 시대 이름도 『만엽집』에서, "평화는 아름다워야"


일본인의 정서와 깊은 연관이 있는 『만엽집』은 2019년 나루히토 일왕이 즉위하며 내건 새 연호 '레이와(令和)'를 만든 바탕이기도 하다. 한 시대를 일컫는 단어인 '연호'를 제안한 사람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만엽집』에서 유래한 단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레이와'는 중국이 아닌, 일본 문학에서 유래한 첫 연호다. 나카니시 관장은 "연호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문장에서 글자를 골라내 조합해 만든다. 기존의 단어를 쓰면 새롭지 않기 때문"이라며 "'레이와'는 매화꽃을 보며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문장에서 골라낸 글자의 조합으로, 어떤 뜻인지 해석은 각자의 자유"라고 설명했다.

이어 "'레이와'는 영어로 '아름다운 조화'(beautiful harmony)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일본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이기도 하다"며 "일본은 평화를 지향해야 하며, 그 평화는 아름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3년 요미우리 문학상을 시작으로 일본 아카데미상(2012), 일본 문화훈장(2013) 등을 받은 나카니시 관장은 "해외에서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며 "말에는 여러 형식이 있지만, 최고의 표현은 '시'라고 생각한다. 고요한 연못의 수면 아래 가득 고인 물처럼 차오르는, 깊이 있는 언어"라고 말했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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