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신당역 사건, 이후 한 달

양성희 2022. 10. 12.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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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혐 범죄' 프레임은 문제지만
본질은 성별에 기반한 젠더폭력
원인 정확히 짚어야 해법도 가능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충격적인 서울 신당역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이다. 20대 여성 지하철 역무원이 자신을 스토킹하던 동료 남성에게 직장에서 살해당했다. 사건 직후 경찰·검찰·법원이 각각 대책을 내놨고, 국회에만 관련 법안이 18개다. 뒤늦은 공분과 사후약방문. 비슷한 장면을 많이 봤다.

지난달 충격적인 스토킹 살인사건이 일어난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살인이 벌어진 여자 화장실 입구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 한 시민이 추모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빼곡한 추모 글들이 눈길을 끈다. [연합]

알다시피 스토킹은 지난해 10월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범죄가 아니었다. 법이 생겼다고 능사는 아니었다. 법안엔 허점이 많았고, 수사하고 법을 집행하는 이들은 있는 법의 적용에도 느슨했다. 회사 측 잘못도 있다. 1년 만에 법 개정 논의가 많은데, 지난 문재인 정부 때 입법 과정에서 나왔던 얘기들이다. 피해자 단체들이 삭제를 요구했던 ‘반의사불벌죄’ 조항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합의를 요구하며 스토킹을 계속하는 좋은 명분이 돼버렸다. 물리적 접근을 넘어 날로 진화하는 온라인 스토킹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컸으나 이 역시 무시됐다. 정부는 법 개정을 통해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삭제하고 온라인 스토킹을 처벌하며, 가해자 위치추적 등의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신당역 살인 사건의 또 다른 논점은 ‘여성이어서 살해당하는 페미사이드(femicide)’ ‘여혐 범죄’ 논란이다. 일단 가해자는 여성 일반을 혐오해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게 아니라 여성이 자신을 고소한 데 앙심을 품고 보복 살인을 저질렀다. 흔히 외국에서 혐오범죄로 규정해 처벌하는 인종 혐오나 소수자 혐오와는 결이 다르다. ‘여혐’ 하면 곧바로 ‘남혐’으로 이어지는 젠더 갈등의 무한루프, 범죄의 복합성이나 효율적 대책을 따지기 전에 작동해 버리는 ‘여혐’ 프레임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소모전을 불러왔다는 피로감이다.
그러나 극단적 '여혐' 프레임이 문제라고 해서 이번 신당역 사건이나 스토킹 범죄의 본질이 젠더 폭력임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스토킹은 남성 피해자도 있지만, 여성이 피해자의 절대 다수인 성별 기반 범죄다(2021년 여성폭력실태조사에 따르면 스토킹 가해자의 92%가 남성이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며 스토킹을 열렬한 구애로 낭만화하거나 ‘내 여자니까 내 맘대로’라는 식으로 여성을 소유물, 혹은 대상화하는 심리가 바닥에 깔려 있다. ‘여자라서 죽었다’고 단순화할 수는 없어도 피해자가 ‘여자가 아니었으면 피할 수 있었던 범죄’인 것은 맞다. 2014년 발효된 유럽평의회의 ‘여성폭력 및 가정폭력 방지를 위한 이스탄불 협약’에서도 스토킹을 여성폭력의 하나로 명시했다.
또 세간의 오해와 달리 영어로 ‘미소지니(misogyny)’인 여혐은 특정 성에 대한 단순 증오가 아니라 여성비하, 여성에 대한 폭력, 성적 대상화 등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성차별을 폭넓게 일컫는 개념이다. 아마도 스토킹 가해자들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여성을 사랑했다”고 할 텐데, 그렇다면 ‘여성혐오 아닌 여성사랑’ 범죄인가.
이 와중에 정부는 여가부를 폐지하고 그 기능을 복지부의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로 이관하는 정부조직개편안을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여가부 폐지에 대해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를 더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권력형 성 비위에 대해서도 피해호소인 시각에서 탈피하자”고 했다. 아마도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평소 대통령의 국정철학에 비추어 보건대 남자, 여자 따지지 말고 범죄가 발생하면 법대로 엄정하게 처벌하자는 얘길 텐데, 젠더폭력을 젠더폭력이라 부르지 못하는데 과연 젠더폭력 근절이 가능할지, 성차(差)에서 발생한 범죄에서 굳이 성별을 지워야 그 범죄를 잡을 수 있는 건지 의문이다.
과거 여가부가 젠더폭력 근절을 위한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못 해 비판이 많았는데, 이젠 장관 아닌 본부장이 그 역할을 하게 생겼다.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대표의 말대로 “신당역 사건은 불법촬영, 스토킹이 살인으로 이어진 전형적인 여성폭력 사건이고, 법ㆍ제도의 보완만큼이나 그 성격을 분명히 하는 게 중요하다.” 본질을 짚어야 정답이 나오기 때문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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