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성품으로 가는 길 '의지'.. 올바른 선택 되도록 돕자

2022. 10. 1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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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교육을 받고 있는 캄보디아 우동글로리국제학교 학생들.


성품의 변화는 넓게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하고 좁게는 인간의 인격 안에 있는 윤리적인 힘이 점점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성품은 또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가끔 저 친구가 사람은 좋은데 술만 먹으면 엉망이 된다거나 우리 애가 착한데 음란물을 끊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좋은 사람, 착한 아이일 수 있지만 이것이 성품은 아니다. 성품은 반드시 의지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많은 오해를 한다. 아이가 말이 없고 착한 것 같으면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오해 때문에 교육의 기회를 놓치고 이것이 대형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미국 학교에서 일어나는 총기 사고를 보면 주변 사람들이 “저 아이가 저럴 줄은 몰랐어요. 조용하고 착한 아이였는데…”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용하고 말이 없던 모습이 아니라 친구들에게 총을 난사한 그 모습이 그 학생의 성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성품은 최종적인 행동으로만 알 수 있고 최종적인 행동으로만 증명되고 판별될 수 있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 생각도 좋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도 좋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좋고 찬양예배에 참석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동이 없다면 이런 신앙은 실제 신앙이 아니다. 이와 같이 신앙도 인지적인 깨달음이나 정서적인 느낌이 아닌 의지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저 친구가 사람은 좋은데…우리 애가 착한데…”라는 겉모습이 아니라 술만 먹으면 엉망이 되고 음란물을 끝내 이기지 못하는 그것이 그 사람의 진짜 성품이다. 성품을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성품교육이 인간 문제의 뿌리가 아닌 겉모양만 다루거나 아이들의 표면적인 모습에 속아 넘어갈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사람이 성품은 좋은데 의지가 약하고 유혹에 쉽게 넘어간다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성품은 의지로 나타나는 실제 행동이며 도덕적인 유혹에 끝까지 저항할 수 있는 윤리적인 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의 의지적인 행동에 대한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이유는 의지가 인간 행동의 최종 결정권자이며 의지가 온전히 기능해야 하나님을 위한 성품의 길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신학이 철학이나 일반 상담과 다른 점이 있다. 철학과 상담은 인지와 정서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지만 신학이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다. 인간이 자유의지 때문에 선악과를 먹었고 자유의지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죄악 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신학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끊임없이 문제 삼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온전히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고 철학과 상담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인지적인 깨달음과 정서 문제 해결은 온전한 의지사용에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 인간의 행동은 어떤 행동의 필요성에 대한 인지적인 깨달음, 정서적인 동기, 결론적인 행동 순으로 물결치며 진행된다. 즉 먼저 깨닫고, 하고 싶은 정서를 느끼며, 마침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지와 정서가 행동의 길잡이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행동이 쉽지 않다. 아무리 옳은 것을 깨닫고,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이 모든 것에 최종 결재 도장을 찍어주는 의지가 협조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의지는 무서운 괴물과 같다. 인간의 수많은 깨달음과 아름다운 소원을 헛된 것으로 만들어버릴 때가 많다. 그 결과 “너는 무수한 깨달음을 얻고, 하나님을 위한 갈망을 가져도, 결국 너의 의지 하나 못 이기는 그런 사람이야.”라는 좌절을 준다. 그러므로 이런 괴물 같은 의지와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야 최후 승리를 얻을 수 있다.

의지가 중요한 이유는 또 있다. 가끔 “나는 의지가 약해 아무 것도 못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는 약해서가 아니라 너무 강해서 탈이다. 인간이 왜 변하지 못할까? 변하려는 의지가 너무 약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안 변하려는 의지가 너무 강해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인간이 죄밖에 지을 수 없는 노예의지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한다. 인간이 자신을 만족시키려는 구부러진 의지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이 구원해주지 않으면 그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노예의지를 갖고 있는 우리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면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갖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은 의지에 집중된다. 인지적인 깨달음과 정서적인 회복도 주시지만 우리의 의지를 구원해주시는 일에 많은 힘을 쏟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는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의지의 힘을 키우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인간의 인격은 지정의의 복합체이기 때문에 의지만 모든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정신은 지성, 감정, 의지의 순으로 파도치듯이 움직인다. 또 역순도 가능하다. 의지가 지성과 감정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중에서 가장 흔한 지성과 감정이 의지에 영향을 주는 것을 살펴보면, 먼저 어떤 생각이 나서 그것을 갈망하게 되고 결국 행동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지성과 감정은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한 몸처럼 움직인다. 즉 슬픈 생각을 해서 슬픈 감정이 생기고 분노의 감정 때문에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처럼 지성과 감정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움직이지만 의지는 그렇지 않다. 의지는 지성과 감정으로부터 밀려오는 파도를 잠깐 쉬게 하는 방파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그러면서 일순간 고민한다. ‘부모님에게 서운한 감정이 있는데 화를 낼까? 참을까?’ 이러다가 ‘에이, 그러면 안 되지.’하고 참기도 하고 실제로 부모님을 찾아가서 화를 내기도 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의지다. 행동을 하는 마지막 순간에 의지가 이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지는 지성과 감정이 시키는 대로 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지성과 감정이 간절히 원해도 의지가 들어주지 않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기도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고 기도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 이렇게 지성과 감정이 원해도 의지가 말을 안 들 때가 많다. 그래서 의지가 시간을 끌면서 버티는 바람에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사라지거나 몇 번 하다가 그만 두게 된다. 의지가 무엇이기에 이럴까? 의지는 기본적인 방향이 있다. 하나님을 위할 것인가? 나를 위할 것인가? 이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이 두 방향 중에서 하나님의 의지 즉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춘 사람 그리고 맞출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다. 하나님의 뜻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의 형태로 기록해놓은 것이 성경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위한 의지보다 나를 위한 의지가 앞서면 슬그머니 기도를 중단하게 된다. 왜 그럴까?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나를 위한 것인데 왜 그럴까? 인지적인 생각으로는 그렇다. 그래서 기도를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기도의 실행 단계에서는 ‘하나님을 위할 것이냐 나를 위할 것이냐’가 좀 더 세분화된다. 그래서 내 육신의 편안함을 위해서는 기도를 중단하게 된다. 기도를 마음만 먹고 실제로는 하지 않거나 몇 번 하다가 그만 두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을 위하든지 내 육신을 위하든지 둘로 갈라지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생각과 감정이 은혜를 받았어도 생각과 감정의 뜻대로 하지 않는 독자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뭔가 선하고 좋은 행동을 하려고 할 때는 일이 이렇게 진행된다. 반대로 악한 행동을 하고 싶은 경우에도 그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때도 ‘내 육신을 위해 악한 행동을 할까? 하나님 때문에 하지 말까?’ 의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님 때문에 악한 행동을 하지 않기로 선택하면 미리 생각해두었던 악한 행동을 하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을 위할 것이냐 나를 위할 것이냐’의 이중성을 갖고 있고 완전히 독립적이다. 이 원리가 성품교육에서 중요하다. 우리는 의지가 항상 선택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 선택은 ‘하나님을 위할 것인가 나를 위할 것인가’의 선택밖에 없다. 인간의 의지를 자극하는 생각과 감정이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올 때 때로는 이 파도에 휩쓸려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의지가 일단 멈추게 한 후에 자기 스스로 고민해서 다음 선택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의지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인간의 의지가 가진 힘은 매우 강력하다. 현대의 심리 상담이 정서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인간의 감정을 역행하는 의지를 동원하는 것이 율법적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의지를 동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우리가 매일 그렇게 하고 있다. 단풍이 좋다고 다 단풍놀이 가는 것이 아니며 술이 기분을 좋게 한다고 다 술을 먹는 것은 아니다. 좋아 보이는 것도 의지적으로 안 할 때가 많기 때문에 의지를 동원하는 것이 억지이거나 힘든 일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온전한 성품교육을 위해서는 의지가 가진 힘을 새롭게 발견해야 한다. 과거의 전통적인 교육과 달리 현대 교육에서 가장 무시되는 것이 의지를 동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억지로 뭘 시키지 마라”, “애들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라”, “의지보다는 아이들의 정서에 주목하라”는 말이 유행하는 요즘의 풍토에서 의지에 대한 재발견은 매우 중요한 일이 되고 있다.

세상적인 교육과는 달리 성경은 IQ(intelligence quotient)나 EQ(emotional quotient)가 아닌 WQ(will quotient)를 강조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뜻(will)과 의지(will)를 담은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의지에 우리도 의지로 대답해야 한다. 생각이나 감정의 뒤에 숨지 않고 우리의 의지로 대답해야 한다. 성경에 순종하라는 말씀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생각을 좀 해보고, 감정이 원하면,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순종하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의지가 가진 힘이 매우 크기 때문이며 의지적인 행동이 주는 혜택이 측량할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품교육의 핵심은 의지가 가진 힘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며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하게 살피고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해주 박사
필자 이해주 박사는 고려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삼성그룹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와 기독교교육학 박사를 취득했다. 석사논문은 ‘청소년의 성품교육을 위한 교육과정 개발’로 박사논문은 ‘기독가정에서 부모의 양육태도가 자존감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성품교육 전문가’이다. 현재는 씨앗교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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