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사역 유산에 큰 자부심.. '힐링 콘서트'로 계승

김시온 2022. 10. 11.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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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위대한 탄생3' 출연 구현모 싱어송라이터
구현모씨는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계시는 선교사님들과 선교지 사람들을 위해 힐링콘서트를 해드리고 또 재정적인 도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합창 단원이었던 어머니와 성가대 지휘자였던 아버지는 문화사역을 자청하고 힘들고 어려운 가정생활에도 불구하고 전국 오지를 다니며 찬양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에 힘썼다. 이런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찬양사역자로 활동하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구현모 씨를 만났다. 구 씨는 MBC 스타오디션 '위대한 탄생3'에 출연하면서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최근 구씨는 찬송가 음반을 내고, 찬양콘서트와 병원 및 소외계층을 찾아다니며 힐링콘서트를 하며 지내고 있다.

구씨에게 최근 활동을 물었다. “저는 대중음악과 찬양사역을 병행하고 있다. 힐링의 코드를 가진 토크콘서트로 주로 기업체와 관공서의 초청을 받아 공연을 하고, 지역축제 및 학교의 초청을 통해 초등학생부터 어르신들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만나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그 외에도 보육원, 소년원, 교도소, 요양원 같은 시설에 기회가 닿을 때 마다 찾아가고 있다. 교회사역으로는 간증 및 힐링콘서트를 통해 청소년 세대부터 장년부까지 다양하게 만나고 있다.

공연 외에도 초·중·고등학교의 싱어송라이터 특강 교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초청하는 곳의 필요에 맞추어 ‘구현모 밴드’로도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구씨는 음악을 하게 된 계기를 “음악하면 부모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부모님 두 분이 처음 만나게 되셨던 곳이 요들클럽이었다. 어머니는 합창단원, 아버지는 지휘자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저를 잉태하신 곳은 아버지가 성가대 지휘를 하셨던 교회의 옥탑 방이었다. 당시 가난한 부모님은 난방도 되지 않는 교회 옥탑 방에서 지내셨다. 제가 어려서부터 본 것은 두 분이 찬양하고 연주하는 것이었는데 음악을 공부할 수 없고 배울 수 없는 환경이 참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저는 호주로 갈 때까지는 찬양팀을 섬기는 것과 워십 댄스로 섬기는 것 외에는 따로 음악을 공부할 수 없었다. 호주에 가면서 부모님과 떨어지게 되었는데 제게는 그 시간이 음악을 내 의지로 시작할 수 있었던 기회(?)의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만 하면서 지냈던 삶에서 노래가 너무 하고 싶었던 저는 버스킹을 하기로 결정했다. 생활비를 아끼면서 모은 돈으로 장비를 구입하여 거리로 나갔다. 늘 기도로 시작했고, 호주의 힐송을 부르면서 버스킹을 했다. 꽤 오랜 시간 버스킹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들으러 일부러 찾아오기도 했고 또 나의 노래가 누군가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달한다는 사실이 놀랍고 행복했다. 사실 버스킹을 하면서도 음악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지만, 내 노래가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는 것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고 힘든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래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고 했다.

구씨가 대중에게 알려진 계기는 호주에서 돌아와 MBC 스타오디션 ‘위대한 탄생3’에 출연한 것이며, 듀엣가요제에서 1위를 하였던 경력 등이었다. 보컬그룹 부활의 리더인 가수 김태원 씨가 '제2의 이문세' 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구씨는 호주 시드니에서 7년을 살았다. “부모님께서는 자비량 문화선교사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판자촌 단칸방을 전전하면서 자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살길을 찾아 호주라는 곳으로 홀로 떠났고, 원래는 영주권을 따서 부모님을 모셔갈 생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그곳에서 청소일, 새벽에 출근해서 12시간 동안 차를 닦는 일, 접시 닦이 등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호주에 간지 3년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한국에 잠시 오게 되었는데, 그때 아버지께서 암 말기 판정을 받으시고 13시간의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의식이 돌아오는 것까지 보고 다시 호주로 돌아갔었다. 그리고 1년 동안 어머니께서 홀로 아버지를 간호 하시면서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고 아버지 또한 호전되지 않으시고 점점 위독해지시는 상황에 잠시 한국에 들어와 아버지를 간호하게 되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보며 눈물이 낫지만 어머니를 위해 화장실에서 몰래 많은 눈물을 훔쳤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살려주실 줄 알았지만 제가 도착하고 보름 후에 제 앞에서 소천하셨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잘 치르고 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호주로 돌아갔다. 남은 3년을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면서 영주권을 기다려 보았지만 결과적으로 7년의 시간이 수포로 돌아갔다. 한국에 쫓겨나듯 돌아오고 나서 보니 어머니도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가 겨우 일어 나셨다고 한다. 어머니와 서로 그동안의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 당시 내 나이 28살이었다. 이때 판자촌에 사시는 어머니를 홀로 두고 군대를 가야만 했다. 홀어머니를 모셔야 할 형편이기에 군 면제가 되는지 알아보았지만 결국은 안되어 입대하여 20대 마지막을 음악과 아무 상관이 없는 포병으로 제대하면서 30대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했다.

구씨는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계시는 선교사님들과 선교지 사람들을 위해 힐링콘서트를 해드리고 또 재정적인 도움을 드리며 살고 싶은 게 꿈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비전을 공유하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갈 탁월한 일꾼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랑으로 품어주는 예수님 닮아가는 삶이되기를 기도하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운 삶이되기를 기도한다”고 했다.

김시온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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