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하는 엄마에게.. "아니야, 그때 날 살린 거야" [신필규의 아직도 적응 중]
[신필규 기자]
▲ 영화관. 자료사진. |
ⓒ 픽사베이 |
그럼에도 기회가 된다면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수백석 규모의 공연장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대형 스크린으로 함께 영화를 보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들 때문일까, 나는 일찌감치 영화와 사랑에 빠졌고 언젠가 꼭 감독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부모님에게 그리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어려서 그렇지 저러다 말겠다고 하셨지만, 중학교에 가서도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어서도 내 목표는 초지일관 영화감독이었다. 당연히 대학도 연극영화과에 가서 연출을 공부할 생각이었다. 그 시간 동안 처음에는 달콤한 회유가 은근한 압박이 되고 결국 격렬한 충돌로 변했다. 나는 연출 공부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고 부모님은 여기에 반대했다.
사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부모님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집안 살림이 넉넉한 것도 아니어서 오랜 지원이 불가능한데 언제 일을 할 수 있을지 성공은 가능한지 알 수 없는 영역으로 자식을 보내는 게 걱정스러우셨을 것이다. 심지어 자기 돈을 들여서 졸업 작품을 만드는 예술대 친구들을 돌아보면 무난히 학교를 졸업하는 것조차 힘들었겠다 싶다.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힌 꿈, 하지만
집안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갈등은 예상보다 허무하게 결론이 났다. 나는 영화를 공부하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법학을 전공했다. 부모님이 무슨 수를 쓴 건 아니다. 막상 입시 원서를 쓸 때가 다가오자 내가 그냥 알아서 포기했다. 이유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영화감독이 어린 시절부터 10년을 넘게 가져온 꿈인 건 맞는데 막상 내가 재능은 있는지 이 일을 해서 행복하긴 할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선택의 시점 전까지는 막연한 꿈도 편하게 꿀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결정해야 할 때가 오자 아무리 오래된 희망이라도 쉽게 골라지지 않았다. 그 이후부터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담보는 내 삶과 미래였다. 그때 처음으로 '이게 현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던 시간이 10년 넘게 흐르고 그 순간과 거리를 두게 되니 부모님도 나도 그 시절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변했다. 가끔 엄마는 나와 예전 이야기를 하다 한 번씩 허심탄회하게 말하곤 했다. 사실 잘 할 수도 있는 건데 너무 성급하게 내 진로를 막은 건 아니지 후회될 때가 있다고. 그냥 원하는 공부하게 내버려 둘 걸 그랬다고.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그때 엄마가 날 살린 거야"
그렇게 말한 건 나이를 먹어가고 내가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면서 대학 입시 원서를 쓰면서 했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영화는 내 길이 아니었다.
▲ 군중. 자료사진. |
ⓒ 픽사베이 |
그리고 나는 지구력도 떨어지는 편이다. 단시간 집중해서 성과를 만드는 건 가능한데 하나의 일에 수개월 혹은 몇 년을 집중하는 건 불가능하다. 지금처럼 짧은 글을 쓰는 건 적성에 맞는 일이지만 두 시간에서 세 시간이 넘어가는 작품의 이야기 구조와 화면 배치를 짜고 거기에 일관성까지 유지해야 한다? 이건 애초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여기에 반복적인 일상생활에서 오는 안정감을 선호하는 것, 사람들과의 갈등이나 의견 충돌을 잘 견디지 못하는 성향 역시도 연출자로서는 정말 맞지 않는 성격이다.
엄마가 지난 시간을 후회할 때면 나는 말하곤 했다. 대학에 가서 영화를 전공하고 무사히 졸업을 했다고 해도 아마 나는 연출자로 데뷔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 못 된다고. 혈혈단신 홀로 성공을 위해 기회를 쫓아야 하는 분야에서 결코 눈에 띄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미 학교는 졸업했고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맞지도 않는 험난한 영화 촬영 현장을 맴돌았을 것이라고. 그렇게 소모되다 젊은 나이에 큰 병이라도 얻어 비명횡사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지 못했지만 모두가 불행하게 살 필요는 없었다. 엄마도 나도.
부담감까지 가지지는 말자
언젠가 영어 공부를 위한 모임에서 작문 주제로 '내가 마음에 드는 나의 성격'이 나온 적이 있다.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내가 겁이 많은 게 좋다고 했다. 실로 나는 무서운 게 많다. 높은 게 무서워서 전망대도 잘 가지 않는다. 호러영화는 반드시 봐야 한다면 소리를 끄고 화면을 손가락 크기로 줄여서 본다.
주변 사람에게 미움받는 것도 두렵다. 갈등이 생기거나 의견이 엇갈리면 언쟁을 하기 보다는 상대의 뜻에 따르거나 원만한 조정으로 마무리한다. 확신이 없는 일은 잘 결정하지 못한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두렵다. 그 무서움을 못 이겨서 조언을 구하고 거기에 따를 때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보다 다른 사람의 판단력이 더 좋았다. 심지어 온전한 내 문제조차도 그들은 객관적으로 봤다. 남의 말을 따르는 게 나은 때가 아주 많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주관이 확고한 성격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면에 주관이 약하고 타인의 말에 잘 흔들리는 성격이 나쁠까.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삶을 살아가며 조금씩 깨닫게 되는 건 사람은 늘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필요한 결정을 모두 하고 이후로는 안정적으로 흘러가기만 하는 삶은 거의 없다. 누군가는 노년의 나이에도 삶을 뒤바꿀만한 결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민한다. 자기가 떠밀리듯 살아가는 건 아닌지. 매 순간마다 최선의 결정을 내리고 주도적으로 선택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너무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건 아닌지 말이다. 지금도 종종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스치듯 지나가곤 한다.
진로를 정하던 시기의 긴 개인사를 공유하며 말하고 싶었던 건 행복이라는 게 참 이상한 것이어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간다고 반드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원하는 것과 내게 필요한 것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결단력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내린 선택이 잘못된 것인지 당장은 알 수 없다. 시간이 흘러야만 답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불안한 미래 앞에서 내가 떠밀리듯 사는 건 아닐까 부담감까지 가지지는 말자. 어떤 이유로 어떤 과정을 통해 누구의 의지에 따라 어떤 선택을 하던 틀린 것이란 없고 행복해지지 못할 이유도 없다. 단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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