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공감 사회는 장례의 회복으로부터 온다-송길원 목사

2022. 10. 1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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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사회는 장례의 회복으로부터 온다
송길원·청란교회 목사, 동서대학교 석좌교수(가족생태학), 하이패밀리 대표

시집살이 서럽다. 하루하루가 슬픔으로 그득하다. 초승달에 눈물 찔끔, 보름달에도 눈물 찔끔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이 상을 당했단다. 쏜살같이 달려간다. 유족들이 꺼이꺼이 울고 있다. 곡(哭)소리는 처량하다. 무언가를 물어볼 수도 없다. 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따라 운다. 서럽게 운다. 이번에는 눈물 한 바가지다.

상대방이 눈물을 그치면 그제야 묻는다. “누가 죽은 거야?” 이 ‘공감(共感)’의 장치가 그들을 살리고 나를 살렸다. 회복탄력성이었다. 우리는 그 눈물로 전쟁의 폐허도 딛고 일어섰다. 호랑이 일만 마리보다 무섭다던 사라호 태풍의 자연재해도 극복했다. 쫄딱 망할 것 같던 IMF 금융 위기도 견뎌냈다. 베이비 부머들이 쏟아진 1958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겨우 81달러였다. 그때로부터 377배 경제 성장을 일구어냈다. 세계인들이 칭송하는 ‘한강의 기적’(Miracle on the Han River)이 맞다. 최근 사회발전지수(SPI: Social Progress Index, 2020)에 의하면 한국이 전 세계 163개 국가 중에서 ‘살기 좋은 나라’ 17위를 기록했다. 미국 워싱턴DC에서 발행되는 ‘US News’의 발표에 의하면 대한민국이 전 세계 여섯 번째 강국이었다. 문제 많은 러시아와 중국을 빼면 4위가 된다. ‘눈물의 힘’이었다.

눈물을 그친 상주와 유족들은 서둘러 잔치를 준비했다. 소를 잡고 돼지를 잡았다. 사람들이 몰려든다. 제각기 위로의 말을 던진다. 고인과 함께 추억을 떠올리며 유족들에게 찬사를 퍼부었다. 유족들에게는 응원가였다.

아비규환의 전쟁터, 전쟁이 끝난다. 주검을 거둔다. 적군이라도 시신을 거두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적(敵)이 아니어서다. 함께 싸운 우리가 있을 뿐. 삶의 전쟁터에서 이래저래 마음 상했던 일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잊혀졌다. ‘우리’만 있었다. 장례식장이 그랬다. 웰다잉이 아니었다. 힐다잉(Healing+Dying)이었다. 치유력이 가져다준 선물은 공동체의 결속이었다. 우리는 모두 하나였다.

질펀한 술판이 벌어지고 저녁이 깊어가면 한쪽에서는 화투장이 나누어진다. 조문객들을 위한 상주의 배려였다. 놀이가 살아났다. 풀 죽은 개도 껑충껑충 뛰며 신바람이 났다. 한마당 축제였다. 지나가는 객도 다가와 배를 채웠다. 고인과 무슨 관계인지 따져 묻지 않았다. 나그네의 배를 채워주는 환대였다.

상여가 나가기 전날 밤은 아예 밤을 새웠다. 저녁 시간, 이번에는 공연이 전개된다. 일명 ‘다시래기’다. ‘다시나기(再生)’, ‘같이 즐긴다(多侍樂)’, ‘망자가 떠나는 시간을 기다린다(待時來技)’ 등의 의미를 가진 단어다. 이번에는 노래와 춤으로 죽은 이를 떠나보낸다. 지친 상주와 유족의 슬픔을 덜어주기 위해 벌이는 연희이기도 했다. 울고 불던 상주도 배시시 웃음을 터뜨린다. 조문객들은 배꼽을 잡고 뒹군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재생(再生)의 길’을 걸었다. 한마디로 힐링캠프였다. 여기서 비롯된 예술혼이 지금의 BTS를 만들고 K-컬처를 만든 유전자였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장치를 잃어버린 것일까. 요즘 장례는 시신을 처리하기에 바쁘다. 장례의 혼(魂)은 온데간데없다. 아이들에게도 더 이상 장례놀이는 없다. 네덜란드 철학가 하위징아(Johan Huizinga)가 말했던 ‘놀이하는 인간(homo rudens)’의 원형이 ‘장례놀이’이고 ‘결혼놀이’였다. 예수님 당시 아이들도 우리처럼 장례와 결혼식 놀이를 했다. 예수님은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놀이를 비유에 등장시켰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마 11:17, 새번역)

‘피리’와 ‘춤’은 유대인뿐 아니라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에게서도 결혼식과 같은 잔칫집에서 기쁨을 표하는 방식의 하나였다. 당시 아이들은 어른들을 모방하여 결혼식 놀이를 하였다. 이어진 ‘곡(哭)’하고 ‘가슴을 치는’ 것은 장례식 풍습으로 장례 놀이였다.

요즘 아이들에게 장례놀이는 사라지고 게임만 남았다. 스마트폰에다 얼굴을 파묻고 산다. 스몸비족(smartphone+zombie)의 출현이다. 스마트폰 안에서 제일 신나는 일은 뭔가와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다. 아이들마저 슬픔을 잃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도대체 영국은 어떻게 해서 왕조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일까.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왕조를 들먹거리느냐고? 아니다. 영국 왕실을 기업 가치로 환산해 보라. 그 가치는 무려 100조(2015년, 567억 파운드의 환율 적용)를 웃돈다(영국의 브랜드 평가 컨설팅 기관인 브랜드 파이낸스 발표).

나는 이번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를 지켜보면서 영국이 왜 영국인지를 알 듯했다. 그들은 슬픔을 내다 버리지 않았다. 슬픔이 막지 못할 병은 없다지 않은가. 슬픔이 치유하지 못할 병도 없다. 그들은 그 슬픔으로 영국병을 치료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죽음 지수 1위 국가가 되었다. 그게 곧 삶의 지수였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한 묶음이지 않은가. 죽음에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사는 것에도 준비돼 있지 못하다. 이번 장례도 60년 전부터 준비해 왔다고 했다. 죽음 주간이 있는 나라가 영국이다. 한국은 평가대상 주요 40개국 중 32위였다. 거기다 자살률 세계 1위다.

지금이라도 ‘한국병’이라 불리는 세대 간 균열, 계층 반목, 이념 갈등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우리는 한국의 장례 속에 깃든 ‘오래된 미래’를 찾아내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꿈꾸는 ‘공감 사회’는 장례의 회복으로부터 다가온다.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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