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북한방송 개방의 나비효과

송세영 2022. 10. 11.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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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월 서울을 중심으로 중부지방 일대에 저녁 9시부터 이튿날 새벽 5시까지 평양인민FM 방송이 청취됐다. 북한이 같은 달 1일 개국한 라디오 방송이었는데 FM라디오만 있으면 누구나 들을 수 있었다.

클래식 음악을 주로 내보내며 북한의 혁명가요와 체제선전용 음악도 곁들였다. 시사 코너 같은 것도 있어서 미국과 남한 정부를 공격하곤 했다. 신기했던 건 선명한 음질과 진행자의 유려한 서울말이었다. ‘여기는 평양입니다’ ‘평양인민FM’ 같은 멘트가 흘러나올 때는 전율까지 느껴졌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북한에서 만든 콘텐츠를 검열이나 편집 없이 그대로 접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이 방송을 바로 차단하지 않았다. 87년 6월 항쟁 후 직선제를 통해 선출된 권력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던 건지 5공 때보다는 여유 있는 태도를 보였다. 여론은 엇갈렸다. 남한 청소년을 노린 체제선전용 방송이니 즉각 차단해야 한다는 주장과 북한 바로알기 차원에서 허용하는 대신 청소년들의 비판적 청취능력을 키워주자는 주장이 맞섰다. 당국이 방해전파를 송출해 차단하기로 결정하면서 논란은 일단락됐다. 북한의 방송전파가 아무런 제약 없이 남한 하늘로 송출된 일대 사건은 한 달도 채 안 돼 끝났다.

권영세 통일부 장관이 지난 7일 국회 국정감사에서 북한방송·언론의 선제적 개방 방침을 다시 확인했다. 북한의 핵 위협과 미사일 도발로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이어서 더 의미 있는 발언이었다. 북한 TV방송의 경우 지금도 위성 수신기를 통해 시청할 수 있지만 접근성이 떨어진다. 인터넷TV 단말기로 시청할 수 있게 한다면 거의 전 국민이 시청권에 들어온다. 남북관계는 물론 국내 정치에도 상상 밖의 나비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

특히 선제적 개방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남북관계에서 엄격한 상호주의를 탈피하겠다는 선언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남북이 합의하에 상호 동등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처럼 대화의 창구가 꽉 막혀 있는 상황에선 기대하기 어렵다. 이럴 땐 선제적 조치가 돌파구일 수 있다. 북한에 동등한 조치를 요구할 수 있는 명분을 가질 수 있고 남한 체제의 우월성과 경쟁력도 대내외에 과시할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 등을 통해 남한 소식을 접하는 북한 주민들도 영향을 받을 것이다.

북한방송·언론 개방에는 남북관계를 톱다운 방식에만 기대지 않고 보텀업 전략과 병행해 풀겠다는 뜻도 있다. 톱다운 방식은 여러 복잡한 난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성공 가능성이 낮다. 선거 등 국내 정치에 이용돼 쇼로 전락할 우려도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지 않은 데다 북한은 핵 포기는 물론이고 핵 협상 여지도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 정부엔 김정은 정권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다. 미국과 중국·러시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제재와 협상을 통한 해결 가능성은 더 낮아졌다.

극적으로 협상의 테이블이 다시 마련될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런 기대만 품고 5년을 더 보낼 순 없다. 유엔 제재의 대상이 아닌 인도적 차원의 교류와 협력에서부터 선제적 조치를 통해 변화를 만들어내는 움직임이 대북 보텀업 전략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보수를 표방하는 윤석열 정부의 이 같은 조치야말로 ‘담대한 구상’이다.

북한방송이 국내에 송출되면 논란과 부작용이 적지 않을 것이다. 북한 연예인이 팬덤을 형성하거나 노골적인 체제선전용 프로그램이 전파를 탄다면 강경 보수를 중심으로 불만이 쏟아질 것이다. 러시아의 서방 선거 개입 의혹처럼 북한이 대놓고 국내 정치나 선거에 개입할 수도 있다.

이전의 진보정부는 이렇게 불거질 색깔론을 경계했을 수 있지만, 윤석열 정부는 다르다. 종북으로 의심받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체제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보수를 설득할 수 있다. 야당이 정부를 비판할 이유도 없다.

그래도 정치권이 두 가지는 약속하면 좋겠다. 여든 야든 북한방송이 언급한 국내 문제를 정치 이슈로 삼지 않겠다는 것,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로 도발해도 선제적 개방조치를 번복하지 않겠다는 것. 북한방송·언론 개방은 북한에 대한 시혜나 퍼주기가 아니라 남북이 함께 미래를 그리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이기 때문이다.

송세영 편집국 부국장 sysoh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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