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의 아트&디자인] ‘물방울’ 그리는 아버지, 김창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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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참 이상한 아버지였습니다. 아내가 어린 아들 형제에게 ‘돼지 삼형제’ 동화책을 읽어줄 때, 그는 달마대사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9년 동안 벽만 바라보고 수행하며 잠들지 않기 위해 자신의 눈꺼풀을 잘랐다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요. 그는 말수도 적은 사람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중년에 접어든 둘째 아들이 “자라면서 가장 힘든 것은 아버지의 침묵이었다”고 했을까요. 어느 날, 이 아들은 아버지의 침묵 아래 속마음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결심을 합니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얘기입니다.
이 영화는 ‘물방울 화가’로 유명한 고(故) 김창열(1929~2021) 화백의 둘째 아들인 김오안 감독이 프랑스 동료 브리짓 부이요 감독과 함께 연출한 장편 데뷔작입니다. 김 화백과 프랑스인 마르틴 여사 사이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란 그는 파리고등미술학교와 파리고등음악원에서 사진과 작곡을 전공한 사진작가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한 화가가 50년 동안 줄기차게 물방울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누구나 던져볼 수 있는 질문이지만, 아들이 품은 의문은 더 컸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이런 예속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까? 단순한 인내심이나 집요한 야망일까, 아니면 조금은 미친 걸까?” 감독은 서울에 사는 아버지를 자주 볼 요량으로 영화를 기획했다는데요, 덕분에 우리는 한 편의 시(詩)와 같은 아름다운 영화를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영화 속 김 화백은 복잡하고 모순덩어리 존재입니다. 도인 같은 풍모를 보여주지만 세상이 성공한 화가에게 주는 환대와 혜택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아들 질문에 답하다가도 뜬금없이 “배고프지 않니?”라며 말길을 돌리고, ‘죽음’(6·25의 어두운 기억)에 집착하고, 공책에 『도덕경』을 필사하는 아버지···.
아들은 아버지가 그려온 ‘물방울’의 의미를 탐구하지만, 하나의 답에 무게를 두진 않습니다. 그건 눈물일 수도 있고, 6·25 때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정화수일 수도 있습니다. 순수한 어린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 혹은 평생 꿈꾸지만 한 인간이 끝내 닿을 수 없는 ‘무위’(無爲)의 경지, 궁극의 평온으로도 읽힙니다. 그리고 혹시 압니까. 생전에 김 화백이 주장한 대로 ‘물방울’은 진짜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풍부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게 이 영화의 큰 미덕입니다.
영화 개봉을 기념해 서울 성곡미술관에선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사진전이 15일까지 열립니다. 평생 그의 곁을 지킨 마르틴 여사와 김 화백의 첫째 아들 김시몽(고려대 불문과) 교수의 글이 또 다른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예술작품을 통해 우리는 알쏭달쏭한 사람들 이야기에 빠져들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조금씩 이해해갑니다. 고집스러운 아버지이자 한 화가의 깊은 비밀 이야기가 우리에게 자꾸 말을 걸어옵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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