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262법칙, 만년필에도 적용됩니다 [김덕래의 만년필 이야기]
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기자말>
[김덕래 기자]
262법칙이란 말이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할 때 조직에서 꼭 필요한 사람의 비율이 20%, 평범해 표가 잘 안 나는 사람이 60%라면, 없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은 사람이 20% 정도라는 뜻입니다. 이 기준을 인간관계에 대입해보면, 10명 중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2명,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6명, 뭘 해도 싫어할 사람이 2명이라는 말이 되겠지요. 성인과 군자도 전부를 만족시키진 못하니, 지극히 평범한 우리가 내 주변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겉보기엔 그저 한 뼘 길이 필기구에 불과하지만, 만년필은 생각보다 뱃구레가 큽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쓸 것'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시대의 흐름을 읽어낸 회사들은 살아남았고, 그렇지 못한 업체들은 소멸했습니다. 살아남은 만년필계에도 262법칙은 적용됩니다. 큰 굴곡 없이 출범 초기부터 승승장구해온 일부 제조사가 있고, 또 어느 회사에나 있을 정도의 시련을 뚫고 자리를 지켜온 다수의 브랜드가 있으며, 나름의 핸디캡을 이겨내고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한 몇몇 업체가 그것입니다.
'꼴'이란 말은 여러 의미를 갖고 있는데, 사람의 얼굴이나 행태 또는 형국이나 처지를 가벼이 부를 때에도 쓰입니다. 때때로 연기력 자체는 흠잡을 곳 없음에도 불구하고, 생김새가 지나치게 뛰어나 저평가되는 배우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모든 걸 다 갖출 순 없으니, 분명 연기력은 떨어질 거라 지레짐작하는 거지요. 그래서 잘 생긴 배우보다, 역할에 맞게 자신의 꼴을 달리하는 개성파 배우들이 더 주목받기도 합니다. 이것저것 다 배제하고 연기력 자체만 평가하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음에도, 가문의 배경이나 출중한 외모 탓에 되레 손해를 보는 셈입니다. 만년필계에선 '듀퐁(Dupont)'이 그렇습니다.
라이터 만드는 듀퐁의 만년필
듀퐁의 역사는 15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872년 프랑스에서 '시몽 티소 듀퐁(Simon Tissot Dupont)'이 창립한 전통 있는 회사입니다. 가죽 가방으로 시작해, 1941년 '퐁~' 하는 특유의 개폐음으로 더 유명한 명품 라이터를 선보이며 럭셔리 브랜드계에 입성했습니다.
라이터의 가치는 그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1960년대 프랑스 사교계에서 사회적 지위를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듀퐁은, 라이터를 명품 반열에 올려놓기에 이릅니다. 100% 수작업으로 제작되는 듀퐁 라이터는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프랑스 장인 정신의 산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 프랑스 태생 토탈 브랜드 에스티듀퐁(S. T. Dupont)의 D로고 |
ⓒ 김덕래 |
듀퐁의 최대 여섯 겹 '차이니즈 래커칠(Chinese lacquer)' 기법은 제품의 내구성을 향상시킬 뿐 아니라, 한층 농도 짙은 깊이감을 표현하는데 제격입니다. 깊이감이 있단 얘긴, 화려함보단 은근함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말입니다. 곁에 두고 오래 봐도 질리지 않고, 더 깊이 빠져들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차이니즈 래커칠 기법으로 마감한 듀퐁 아틀리에 브라운 M촉 |
ⓒ 김덕래 |
듀퐁은 필기구만 생산해온 전문 업체가 아니니 외양만 그럴싸할 뿐, 만년필의 핵심인 필기감이 기대치에 미칠 리 없으며, 마감 역시 허술할 거라는 선입견을 가진 이들이 있습니다. 그건 마치 사람을 대할 때, 생김새나 옷차림만 보고 됨됨이를 서둘러 예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홉 번 구운 죽염을 최고로 치지만, 그보다 횟수가 적어도 대나무 통 속에 천일염을 넣어 구웠으면 그 자체로 죽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시간을 들여 아홉 번 반복하는 이유는, 그 과정을 거쳐야만 제대로 된 죽염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워진 소금을 잘게 부숴 다시 구워낼 때마다 내부의 불순물이 타버리며 점점 질이 좋아지는 죽염처럼, 만년필에 한 겹 한 겹 옻칠을 올릴수록 보다 단단해지고 색이 뚜렷해집니다.
수순을 따른다는 건, 최소한의 사회적 약속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도자기를 구울 땐, 정해진 과정을 순차적으로 밟아야만 합니다. 기물의 형상을 만들어 초벌구이를 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유약을 칠한 후 재벌구이 과정을 거쳐야만 매끈하게 광택이 나는 도자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 슬릿 틈새에 엉겨 붙은 채 굳어진 잉크 잔여물 |
ⓒ 김덕래 |
펜촉 후면부와 피드가 오염되고, 내부 곳곳이 막혀있더라도 낙심하기엔 이릅니다. 말썽의 원인만 정확히 알아내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 설령 영문을 몰라 여기저기 손대었더라도, 금속 도구만 사용하지 않았다면 일단은 안심입니다.
▲ 가끔 세척하는 것만으로도, 훨씬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
ⓒ 김덕래 |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나
세상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내가 어느 편에 서있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집니다. 펜촉을 종이에 대고 글씨를 쓸 때, 종이 입장에서 보면 잉크를 빨아들이는 것이고, 반대로 펜 입장에서 보면 글씨를 새기는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기준을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 바람이 나뭇가지 끝에 살짝 걸쳤다 날아가는 것처럼, 딱 그 정도로도 좋습니다 |
ⓒ 김덕래 |
평소 아무리 태세를 야무지게 하고 살아도, 갑자기 불쑥 날카로운 말송곳 들이미는 사람을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합니다. 한 사람의 뾰족한 말이 두고두고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기도 합니다. 아무리 태연한 척해도, 세상에 피 흘리고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다만 낯빛을 가린 것뿐입니다.
살다가 무례한 사람들과 마주했을 때, 호승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온몸에 상처만 입고 물러서기 십상이니 이것은 하책입니다. 남의 일인 양 못 본 체 지나치면 언제고 다시 달려들기야 하겠지만, 당장의 위기는 넘길 수 있으니 중책에 속합니다. 목소리를 낮게 내더라도 형형한 눈빛으로 소신 있게 행동해야 누구도 나를 함부로 흔들어대지 못합니다. 이런 대응이 상책에 해당합니다.
해가 뜨면 어제와 다름없이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게 우리의 오늘이지만, 낙담하지 마세요. 종이 위를 닿을 듯 말 듯 가볍게 훑고 지나가는 펜촉처럼, 그저 내 인생을 스쳐가는 무수한 타인 중 한 명일 뿐입니다.
▲ 잘 조정된 만년필은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써집니다 |
ⓒ 김덕래 |
* 에스티듀퐁(S. T. Dupont)
- 프랑스 태생 토탈 패션 브랜드. 80여년 전, 특유의 개폐음으로 더 유명한 세계 최초의석유 연료 라이터를 발명해 큰 성공을 거둠. 생산하는 다른 아이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은 1970년대 초반부터 필기구를 만들었으나, 필기감에 대한 만년필 사용자들의 평판은 안정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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