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한국과 상호보완적 생태계 가진 독일과 손잡아야

2022. 10. 10.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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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패권 시대의 기술주권 전략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영화관에서 맨 앞줄의 사람이 조금 더 잘 보겠다고 일어서면 뒷줄의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일어서야 한다. 결국 영화관의 모든 사람이 서서 영화를 보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영화관 효과’라고 한다. 사교육 열풍의 폐해를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되는데, 미·중 기술패권 경쟁의 와중에 주요 국가들이 전략기술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을 가장 잘 묘사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미국과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 30여 국가에서 기술주권을 지키고자 국가전략기술을 선정하고 각종 육성정책과 지원법안을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다. 지난 10여년간 예열해오던 미·중 패권분쟁에 코로나 팬데믹과 글로벌 공급망 불안, 거기에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대만사태와 같은 지정학적 안보위기가 겹쳐진 결과다. 결정적으로는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려는 정치인들이 ‘기술주권’이라는 단어를 정치적 아젠다로 채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 세계가 거대한 영화관 효과를 목도하고 있다. 거의 모든 국가가 인공지능·클라우드·퀀텀컴퓨팅·첨단바이오·우주 등 극소수 기술들을 전략기술로 선정하고, 그 좁은 분야에 경쟁적으로 자원을 쏟아붓고 있다. 첨단 반도체라는 한 분야에 투자하겠다고 약속한 돈만 해도 미국 1000억 달러, 중국 1400억 달러, 유럽 420억 달러, 일본 470억 달러다. 학생에게 필요한 많은 소양을 알지만, 국·영·수를 잘해야 경쟁에서 이긴다는 절박감에 모든 학부모가 같은 방식으로 중복투자하고 있는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 옆눈 가린 말처럼 내달리는 시대
“미국 기술보호주의, 당분간 지속”
한국은 미·중과 전략 환경 달라
개방적인 기술 공동체 전략 짜야

제이콥 에들러 독일 프라운호퍼 시스템과 혁신연구소(ISI) 소장이 지난 5일 서울 역삼동 한국고등교육연 구재단에서 열린 기술주권과 전략기술에 관한 국제포럼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 김현동기자

전략기술과 산업육성을 위한 정책들도 산업혁명 이전의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그대로 빼닮았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금기시되던 기업 대상의 직접보조금 정책도 거리낌 없이 쓴다. 테슬라는 한때 경영이 어려워졌을 때 4억 6000만 달러의 정부보증 대출을 받았고, 미국의 태양광업체 솔린드라는 5억 3500만 달러의 정부보증 대출에도 불구하고 결국 2011년 파산했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전통적으로 정부의 직접 지원을 금기시해왔던 미국의 태세 전환에 전 세계가 더 놀랐다.

소수의 전략기술에 세계 여러 나라가 중복해서 자원을 쏟아붓는 기술보호주의는 기술혁신의 원리에 정확히 반하는 추세다. 기술발전은 닫힌 생태계가 아니라 개방된 생태계에서 여러 기술요소가 융합될 때 이루어진다. 코로나 사태의 해결사로 등장한 mRNA 백신만 하더라도 동유럽 이민자 출신 연구자가 만들어낸 기술과 미국·유럽의 스케일업 역량, 한국과 인도 등 여러 국가의 생산역량이 합쳐져 탄생한 것이다. 17세기 과학혁명과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인류가 오늘의 기술문명을 누리게 된 그 원리다. 그러나 21세기의 세계 각국은 옆눈을 가린 말처럼 같은 경로를 따라 앞자리를 차지하려 미친 듯이 내달리고 있다.

이런 배경 하에 지난 5일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과 한국고등교육재단, 그리고 독일의 프라운호퍼 연구소가 ‘기술주권과 전략기술’을 주제로 국제포럼을 열었다. 발표자 가운데 지난 수십 년간 미국 상원의 전문위원회에서 기술정책과 산업정책을 만드는데 기여해 온 MIT 대학의 윌리엄 본빌리안 교수는 미국의 보호주의적 정책이 등장한 배경으로 국내 정치의 압력을 꼽았다. 2000년대 이후 20년간 미국 제조업에서 6만 개의 공장이 문을 닫았고, 제조업 일자리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구글·페이스북 등 새로운 스타기업이 탄생했지만, 소득 격차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고, 중산층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선거에 목맬 수밖에 없는 정치인들은 보수, 진보할 것 없이 ‘우리 미국’을 모토로 원색적인 산업·기술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본빌리안 교수는 80년대 이래 계속된 제조업 경시 풍조도 현재 위기의 한 원인으로 꼽는다. 최근 연일 발표되고 있는 미국의 산업정책이 바로 제조업 경쟁력을 되살리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미국의 정책방향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기술주권 논의, 정치 구호화해

독일과 유럽의 기술주권 논의를 선도하고 있는 프라운호퍼 시스템·혁신연구소 제이콥 에들러 소장의 해석도 유사하다. 그는 기술주권 담론이 유럽 내에서 인기를 얻게된 원인으로 역시 정치인의 영향을 꼽는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여 경쟁력을 잃어가는 유럽의 산업 현실에서 ‘경쟁에서 이기려면 우리 유럽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만큼 정치적으로 잘 먹혀드는 구호도 없다. 게다가 전체주의 성향의 중국이 글로벌 영향력을 넓혀가는 불편한 상황도 한몫했다. 에들러 소장은 기술주권론이 배타적 보호주의로 흐른다면 국내의 저급기술과 기업들이 보조금으로 혜택을 보는 지대추구 현상이 심해지고, 결국 ‘유럽인이 만든 기술’이라는 폐쇄적 프레임에 갇혀 장기적으로 유럽의 기술 경쟁력이 뒤처질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기술주권을 지키려 할수록 더 개방적인 협력관계가 필요하다고 애써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기술이 단순하고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중세가 아닌 이상 어느 국가도 오늘날 그 복잡한 전략기술의 모든 세부요소와 모든 생산기능을 다 가질 수 없다. 모든 나라가 반도체 기술을 이야기하지만, 70개국 이상에 걸쳐 1000번 국경을 넘어야 칩 하나가 만들어지는 것이 현대의 기술이다. 그래서 기술주권은 모든 것을 다하겠다는 자급자족이 아니라 커다란 퍼즐판에서 고유한 퍼즐을 갖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현악기를 잘하는 국가와 금관악기·타악기를 잘하는 국가의 기술이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 교향악단을 구성해야 수준 높은 교향악을 연주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반대로 기술주권이라는 개념이 배타적 애국주의와 섞이고, 단기적인 정치 이해타산에 매몰되면 자급자족형의 폐쇄적인 혁신생태계로 후퇴하게 된다. 장기적으로 국가의 기술경쟁력을 높이려면 폐쇄적 느낌의 ‘기술주권’이라는 개념보다 개방적 지향의 ‘기술공동체’라는 개념에 더 주목해야 한다.

개방적 협력 환경을 갖춘 나라 돼야

세계적인 기술보호주의 열풍에서 한국의 전략적 방향은 미국·유럽, 혹은 중국과 같을 수 없다. 그들은 내수 시장이 크고, 다양해서 독자적인 혁신 생태계를 구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기술 생태계 규모는 첨단기술의 복잡성에 비추어 턱없이 작다. 이런 상황에서 폐쇄적이고, 국산화를 지향하는 자급자족형 기술주권 전략은 한국의 기술 혁신 속도를 극적으로 떨어트릴 것이다. 한국의 기술주권 전략에서 개방적 협력이 제1의 원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이참에 발상을 전환하여 치열한 기술주권 경쟁을 계기로 전 세계가 깜짝 놀랄 정도로 개방적 협력 환경을 갖춘 나라로 탈바꿈해야 한다. 우리 K-팝이 작은 내수시장의 한계를 뚫고 세계 무대에서 고유한 장르로 자리잡게 된 바로 그 성공의 비결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술보호주의로 일방 질주하고 있는 세계를 향해 제로섬의 ‘기술주권’ 경쟁이 아니라 포지티브섬을 지향하는 ‘글로벌 기술공동체’를 만들자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세계가 직면한 기후변화와 팬데믹, 고령화와 디지털 전환과 같은 글로벌 챌린지에 각자의 고유한 퍼즐을 가지고 협력적으로 해법을 찾자고 앞장서 주창해야 한다. 미래를 지배하는 국가는 바로 글로벌 챌린지의 해법에서 대체불가능한 퍼즐을 가진 국가가 될 것이란 점을 생각하면 장기적으로 수지타산도 맞다.

궁극적으로 글로벌 기술공동체를 지향하되 단기적으로 효과적인 출발점은 보완적 관계에 있는 국가와 양자간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독일은 훌륭한 파트너다. 유럽이라는 모판 속의 독일과 홀로 동떨어진 한국은 지정학적 조건이 판이하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미·중의 선택압력을 받고 있고, 제조업이 강하면서, 유럽과 아시아 지역 각각에서 혁신의 허브를 지향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가장 중요하게는 기계산업이 강한 독일과 정보통신산업이 강한 한국이 상호 보완적인 기술생태계를 가지고 있어 활과 화살같은 협력적 기술주권의 모범적 사례가 될 수 있다. 긴밀한 한·독 기술협력 관계는 대미 협상에서도 제3의 대안으로서 또 다른 지렛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포럼에 참여했던 전문가들 간에도 글로벌 위기의 해결을 위해 폐쇄적인 기술주권을 넘어 개방적 기술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있었고, 이를 ‘서울 컨센서스’로 제시하자는 의견도 나왔다. 진정한 기술선진국이 된다는 것은 세계가 함께 고민하는 주제를 던지고 같이 판을 만들어 가자고 선도하는 국가다. 우리가 이야기한다고 귀담아 들어줄 국가가 있겠느냐는 걱정을 미리 할 필요가 없다. 세계의 문제를 지향하는 철학적 눈높이를 가진 국가, 그런 한국의 위상을 지향하면서 지금부터 담론을 던지고 이를 뒷받침할 핵심 퍼즐을 키워야 한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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